칼럼번호 39  등록일 : 2002-08-20 오후 7:09:11

왜 사냐거든....
글 : 허신영 ()

한 밤중에 창밖을 내다보고 깜짝 놀라 한참을 그대로 서 있었다.

옛날이다.
내가 기울어가는 외딴 초가집에 살 때, 우리 초가집에는 양은으로 된 쟁반이하나 있었다.
찌그러진 모양새였으나 늘 쓸모있게 제 구실을 다 하고있어 항상 가족의 일원처럼 정감 어려, 보기만 해도 반갑고 허물없는 쟁반이었다.
쟁반같이 둥근달 이라고 하지만 한쪽이 찌그러진 우리집 쟁반은 보름달의 모습이 아니었다.

나는 어렸을적 "달 달 무슨달 쟁반같이 둥근달~" 이라는 노래를 부를때마다 우리집 찌그러진 쟁반이 생각났고 그럴때마다 보름달처럼 둥그렇지 못한 우리집 쟁반이 가엾게 느껴지기도 했었다.

그런데 그 날밤 나는 그 옛날 내가 살던 초가집의 찌그러진 쟁반 모습을 닮은 달을 보았다.
보름달로 차 오르고 있는 그 날 밤의 달은, 옛날의 그것처럼 조금 찌그러진(기울어진) 듯 한 모양이었다. 고향의 옛 쟁반을 본 듯한 반가운 마음으로, 약간은 자랑스런 마음으로 "쟁반같이 둥근달~"을 입 속으로 불러보았다.

그 붉고 커다란, 내 어릴 적 기울어 가는 초가집의 기울어진 쟁반 모습을 떠올리게 하는 그 달은 주변의 구름까지도 붉게 물들이며 별들의 컨페티 속에 너무나 황홀하리만큼 아름다운 자태로 하늘에 놓여 있었다.
달 아래로는 도랑의 나무들과 담장이 실루엣으로 완벽한 어둠의 정적을 자아내고, 바다건너편의 추라모어 마을의 불빛은 지상의 별이 되어, 자연과 문명의 완전한 조화를 이루고 있었으니 나는 그 밤의 아름다움에 도취되어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그 밤의 아름다움에 떨리고 흥분된 나는, 내일의 기대로 중화시키며 잠자리에 들었다.

그렇게 달을 보내고.

해는 이 세상에서 가장 강한 매력을 가진 자연이다.
그 해가 떠오르는 아침은 찬란하다.
새들의 지저귐과, 이슬을 떨치며 깨어나는 길가 풀숲, 그 풀숲 사이사이 피어있는 들꽃들, 그네들이 풍기는 입김 같은 신선한 아침향기, 가지마다 푸르고 싱싱한 이파리들의 나무들의 행렬을 보며 건강하게 살아있는 아침에게 반가운 인사를 나눴다.

누가 내게 특기나 취미를 묻는다면 나는 이렇다할 답변이 궁색한 사람이다.
생활의 한 부분인 독서를 취미로 말할 수는 없는 일 (책은 꼭 재미있는 책만 읽는 것은 아니므로), 또한 특별히 잘 하는 특기도 없다.
그런 내가 요즈음의 하루하루를 생활하며, 길섶 나뭇가지 우성 한 시골길을, 햇살이 살포시 펴오르는 날, 음악과 함께 혼자되어 운전을 하는 것에 마음이 편안해지는 것을 느낄때가 있다.
운전을 할 때면, 나무도, 잔디도, 하늘도, 바다도, 사람도 모든 자연이 해를 반기고 사랑하며, 결코 치장되지 않은 자연 그대로의 밝고 깨끗한 얼굴을 선명하게 바라볼 수 있다.
스크린의 화면처럼 스쳐 지나가는 이 모든 자연을 보고 느낄 수 있기에 그래서 이런 것을 취미라고 불러도 된다면 나도 취미란에 한가지 기입할게 생긴 샘이다.

그렇게 아침을 맞으며 흥겨운 마음으로 운전석에 앉으니 나는 취미생활을 아침부터 한 것이다.

NLP (Nuero Linguistic Programme) 세미나에 적잖은 기대감과 호텔에서의 4 코스 점심식사까지 곁들인다는 것에 즐거운 흥분으로 고조되어 지정장소 호텔로 향하였다.
이런날은 다만 몇분이라도 일찍 도착하여야 한다는 마음과 그 실천에 스스로 기특해하며 동료가 알려준 위치라고 생각되는 곳을 찾아 주차장에 쉽게 주차했다.

늘 다니던 곳이지만 호텔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는걸 의아해했지만 아이리쉬들은 간판에 소홀한 사람들임을 잘 알므로 일단 호텔식당쯤으로 생각되는 곳에 문을 밀고 안으로 들어갔다.
아직은 이른시간이어서 중년의 여자가 글라스들을 정리하고 있다 내가 들어가자 고개를 들고 약간 뜻밖이라는 듯 쳐다보았다.
"실례합니다만 이곳이 마너호텔인가요?"
"아니, 여긴 식당이예요"
"그럼 마너호텔은 이곳 어디쯤인가요?"
"여기서 5분만 더 가면 있어요. 가까워요"
여자는 약간은 짜증섞인 목소리고 대답했다. 아침부터 엉뚱한 호텔을 찾는 내가 자신의 일을 방해하였다고 느꼈는지 모르겠다.
"그 호텔이 이쪽인가요 아님 길건너편인가요?"
"조금만 가면 간판이 보일테니 찾아보세요"
귀찮아하는 듯한 표정이 역력했으므로 더 이상 물고늘어지지 않기로 했다.

그 식당을 나오니 조금은 막막해졌다. 이곳은 내가 늘 다니던 길이었고 호텔을 본 적이 없는데 어떻게 보이지 않은 호텔을 찾을 것인가.

분명 모린(내게 위치를 알려준 동료)은 내게 이곳 건물이라고 했는데....
시내를 조금만 벗어나면 한적한 숲속에 마너호텔이 있다라고 알고는 있었지만 시내에도 같은 이름의 호텔이 있다고 들었고 우리 세미나는 시내의 호텔에서 한다고 알고있었다.
그런데 정작 찾지 못하고 시간은 점점 흐르고 있었다.

건너편의 주유소에서 빗자루질을 하는 청년에게 다가가 물었으나 그 역시 주위의 마너호텔은 알지 못하노라고 말하며 시내를 빠져나가야 한다고 했다.

세미나를 주최하는 측에 전화를 했지만 모발폰은 꺼져있었고 집으로 연락을 해도 소용없는 일이었다.
난감해진 나는 스트레스를 받기 시작했다.
이리저리 주위를 배회하다 한 청년에게 물었다. 그 청년은 아이리쉬답게 좀 더 정확히 알려주기위해 다른사람으로부터 자문까지 구하며 친절히 그리고 자세히 숲속의 마너호텔의 위치를 알려주었다.

숲속의 마너호텔이 아니라고 분명히 들었지만 내가 할 수 있는 방법은 그 숲속의 같은 이름을 가진 호텔을 찾아보고 그곳도 아니라면 그 호텔에서 근사한 아침식사와 차를 마신 후(여차하면 브랜디라도 한잔 걸치고) 그냥 집으로 돌아올 예산으로, 막말로 밑져야 본전이라는 심산이었다.
그래도 나는 적잖이 화가나 있었다. 이미 시간은 세미나 시작시간에서 40분이나 넘었으며 기대에 찬 이 NLP 의 중요한 첫날을 완전히 빠지게 되는 것이다.
왜 내가 좀 더 정확히 사전답사를 하지 못했는가와 길을 잘못 알려준 동료와 주최자의 설명부족까지 포함해 화가 나기 시작했다.

호텔은 쉽게 찾을 수 있었다. 몇 년전에 식사를 하러 왔었던 곳이라고 어슴푸레 기억이 났다.
길 가 양쪽으로 즐비하게 늘어선 나무들 사이에 난 좁은 오솔길을 질러 한참을 들어가니 호텔이 보였다.
Parking 이라고 쓰인곳에 주차를 하고 일단 호텔문을 열었다. 유리창이 많이 달려 무척 훤한 구조가 맘에드는 산뜻하고 고급스런 호텔이었다.
흰 블라우스에 까만색 유니폼을 입은 웨이트레스에게 다가가 물었다.
"이곳에서 혹 세미나를 하지 않나요?"
"네, 꽤 늦었군요. 저쪽 빌딩 왼쪽으로 들어가면 있어요"

설마 하는 마음으로 웨이트레스가 가리켜 준 건물로 들어가 라운지를 지나니 문이열린 연회장속에 낯익은 얼굴들이 앉아있었다.
찾았다는 안도감보다는 헤매다 늦었다는 화가 불쑥 밀려왔다.

잔뜩 일그러진 인상으로 열댓명이 앉아있는 실내에 들어가 그 중 빈자리에 핸드백을 휙 던졌다.
"기분 더럽군요! 뭐예요. 이 곳을 찾느라 얼마나 시간낭비를 했는줄 알아요?"
이렇게 신경질을 부리며 말할 계획은 아니었다.
그냥 화가 나서 그렇게 나와버렸다. 내게 표적대상이 된 사람은 사실 정확히 없었다.
나만 빠진 자리에 모두 앉아있었고 세미나가 진행중라는 사실이 나를 화나게 했다.

좌중의 시선은 이미 나에게 집중되어있었고 거기다 "I am pissed off!" 이라는 결코 숙녀답지 못한 거친 표현까지 내 입에서 나가자 모두들 눈을 휘둥그래 뜬 채 침묵만 남았다.
주최자는 내게 다가와 정말 미안하다는 말을 연발하였고 세미나는 다시 시작분위기로 진행되었다.
세미나를 다시 처음부터 시작한다는 데야 나도 더 이상 화를 낼 이유도 없었고 무엇보다도 내 속마음에서 우러나는 화를 표현하였으니 더 이상 화가 남아 있지도 않았다.

언제나 숙녀답고 결코 남 앞에서 화내는 인상을 보이지 않는 신영이.
남 흉을 보는 일이 없어 주위사람들로부터 조용한 요조숙녀라고 칭찬 받는 신영이
남편에게 늘 순종하고 화목한 가정을 꾸린다고 부부싸움 이라는 말조차 이해못할 것 같아 보이는 신영이
이렇게 착해 "보이는" 여자여서, 단맛도 짠맛도 쓴맛도 신맛도 그 아무 맛도 없는 맹맹한 여자 신영이.
화가 날 때 화도 제대로 낼 줄 모르고 사는 신영이
이웃집이든 남편이든 맘 터놓고 흉하나 맘대로 볼 수 있을 사람이 없는 신영이
모든 것을 내 스스로 감수하며 살아야 하는 사람처럼 속으로만 앓고 사는 신영이
분명 맛으로 따지자면 아무 맛도 없는 나 이다.

나는 착한 사람이라는 말 듣기를 원하지 않으며 그리고 결코 착하지도 않은 사람이다.
그 말은, 나도 충분한 감정을 느끼고 사는 사람이라는 말이다.

이제 조금씩 그 감정을 드러낼 줄 아는법을 배우고 있으니 이들 표현대로 껍질 속에서 점점 기어 나오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식당으로 향하는 도중 '다리나'가 내게 달려와서는 말한다.
"신영! 너 좀전에 넘 멋있었어! 얼굴에 인상쓰고 기분 더럽다 하는데 정말 쌔 보였다구"
화를 내고 칭찬받기는 내 생전 처음있는 일이지만 나쁘지 않다.

'로라'도 내 옆으로 와서는 좀전의 내 행동을 축하?해 준다.

오전 세미나가 끝나고 드디어 점식식사 시간이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는 말처럼 어디 그 아무리 좋은 경치든, 의미심장한 강의든, 식사시간만큼 마음이 놓이고 즐거운 시간이 있겠는가 싶다.

커다란 원탁에 두 패로 나뉘어 열명남짓한 사람들이 내가 앉은 테이블에 앉았다.
이래저래 담소 중에, 저쪽에서 낯익은 얼굴이 내게 손을 흔들며 인사를 해왔다.
데이빗의 친구 부부였다.
이 오솔길 한적한 호텔에서 뜻밖의 낯익은 얼굴을 마주친 나는, 한마디 테이블에 내놓았다.

"요컨대 이 작은 나라 아일랜드, 특히 이 작은 타운 워터포드에서는 정말 바람피우기 참 힘들겠어, 어딜가든 꼭 아는 사람을 만나고 마니 말야"

내 말을 맞받아 내 옆 건너 "다리나"가 말한다
"신영! 그런건 염려할 게 못돼, 바람피울 장소는 얼마든지 있고, 바람피우는 남자 소문은 온 아일랜드가 다 알지라도 결코 그 부인만큼 감쪽같이 모르거든"

"그럼 바람피우는 사람들은 다 어디로 가서 열애를 하는 거지?"

다리나의 대답이 또 이어진다.
"보통 친구집에 가거나 부인, 남편이 외출중일 때 자리를 빌린다구"

저 쪽에 앉은 메리도 한마디 거든다.
"내 친구는 사촌이 바람피우러 술한병 사들고 오면 아파트 키를 건네주고 몇 시간 사라져 준데"
내 옆자리의 마가렛이 조용히 말한다.
"신영! 바람피울 장소를 모색중이라면 언제든 우리집으로 와. 내가 키 건네주고 방 비워줄테니 말야"

다리나가 흥분된 얼굴로 한마디 못을 박는다.
"상대를 속이는 정사는 크게 잘못된 일이고 정죄 받아야 마땅해"

세미나를 이끄는 싸이코테라피스트 순덕의 말이다.
"매사에 옳고 그르다는 판단이 있을 수 없어. 사람마다 모두 다른 환경과 상황속에서 사건은 달라지니 무엇이 옳고 그르다는 기준도 달라지니까"

마가렛이 한마디 덧붙인다.
"결혼생활이 불안정하다면 그래서 남편이나 아내가 다른 상대에게로부터 위안을 받아 생활의 활력소가 되어 결혼생활이 유지될 수 있다면 충분히 좋은 일이라고 생각해,
그러니 바람피우고 싶은 사람 있으면 장소 제공할테니 얼마든지 오라구"

"그러다 상대가 알게되면 어떻게 해요?"

"물론 그 결과에 대해서 책임을 질 수 있는 자세가 되어있어야겠지"

다리나는 참다못해 또 한마디 거든다.
"상대에게 그 속았다는 분노와 배신감을 준다는게 얼마나 나쁘냐구요"

"다리나! 배우자의 바람을 네가 전혀 알지 못하고 있다면 그게 너와 무슨상관이야?"
내가 감히 내뱉은 말이다.

순덕이 한마디 예를 든다.
"한국에선 러브호텔이라는 것이 아주 많고 장사가 잘 되는 업종중의 하나야. 우리가 대낮에..."

"우리? 우리라니? 그게 뭔 뜻이지"
모두들 푸하하하

웃음을 참으며 순덕의 말이 이어진다.
"개인적인 사정에 우리 식구 몇몇이 대낮에 한 호텔을 갔는데 번호판이 모두 가려진 주차장이 차들로 꽉 차 있더라구. 그때가 낮 1시 2시 정도였는데..."

마가렛이 순진한 표정을 일부러 지으며 끼어든다.
"물론 그 사람들은 점심식사하러 온 것이지"
모두들 웃느라 식사를 할 수가 없다.


"아일랜드에도 러브호텔이 빨리 생겨야하고 성행해야 한다구" 마가렛이 얼릉 덧붙인다.

"내가 택시를 탔는데 택시안에 태극기가 있어 그 택시기사에게 물었지. 한국을 아느냐고, 그랬더니 그 택시기사가 하는말이 월드컵때 한국을 다녀왔는데 한국 사람들은 너무너무 친절하고 재미있고 원더풀 하다고.... "

마가렛이 또 끼어든다
"그러니까 그 택시기사는 어떤 월드컵을 다녀왔는가 냐 이거지"
모두들 웃느라 정신을 가눌 수가 없다.

"남자들은 그들 사이에 이런 대화를 하는 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여도 여자들이 말하는 것에는 위협감을 느끼고 불안해하지"
누군가 한 말이다.

세미나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중 오늘 점심시간 자리를 생각하며, 나는 그때와는 반대로 울고 있었다.

늘 데이빗의 아내로서 소개되어왔고 생활해 온 나, 그 그늘 속에서 "나" 로 존재하기보다는 늘 남편의 그늘아래에서 조용히 미소만 지어보여야 했던 내가 아닌 데이빗이라는 사람의 아내.
나를 아는 사람들보다는 데이빗을 알기에 나를 덤으로 아는 사람들, 그리고 그들과의 만남에서 늘 희미한 미소만 띄우던 나.

12년이라는 생활동안 나를 아는 사람들과의 만남이 없었고 당연히 호탕하게 농담을 주고받으며 웃을 일이 없었던 나를 생각하니 내가 그동안 어떤 삶을 살아왔던가 라는 회의가 생긴다.

혼자하는 산책을 더 좋아하고 사색하길 좋아하는 나 이지만 그래서 그런 삶을 스스로 자청한 것이라고 위안하며 혹은 감추며 살아왔지만, 사실은 내 삶이 많이 외로웠구나 라는 생각이 든다.

"왜 사냐거든 웃지요" 라는 싯귀절이 생각난다.
그 시인의 "웃지요" 라는 숨은 뜻은 여러 가지를 내포했겠으나 굳이 말로 표현할바가 되지 못하지 않겠는가를 뜻한 듯 하다.

누가 내게 왜 사냐고 묻는다면 나 역시 "웃음"을 대답으로 내놓고 싶다.
그 시인은 깊은 속뜻과는 달리, 나는 다만 현실적인 말로 답하고 싶다.
삶은 웃기 위함이다.
웃으려면 즐거워야 하므로 즐겁기 위함이다
사람들은 좀 더 즐거워지려고 욕구충족을 위해 부단히 노력하는 그 과정이 삶이다.

완전한 원형의 모습을 갖추지 않은 보름달에서 오히려 애정을 느끼듯, 때로는 맵고 짠 맛에서 더 감칠맛을 느끼듯, 나의 있는 모습 그대로 호탕하게 웃고, 울고 , 화낼 줄 아는 그런 나!

적어도 "가장 많이 웃을 수 있는 삶으로 가는 길"에 가까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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