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번호 23  등록일 : 2001-03-21 오후 4:59:31

아사르의 향기
글 : 허신영 ()

그저 뜨끈뜨끈 등짝 지질 수 있는 구들방 같은 따끈한 해가 드는 곳, 그렇지만 그 등짝 속의 등골은 빠지지 않을 만큼 저렴한 곳, 그런 나라를 찾아내라고 말해왔었다.
6개월 혹은 1년을 앞세워 미리 여행계획을 세우고 예약을 해놓는 이곳 친구들은 그 여행에 희망을 걸고 반년을 혹은 일년을 들뜬 기분으로 보내기도 한다.
하지만 데이빗은 늘 즉흥적으로 행동하는 사람이어서 함께 살다보니 나도 어지간히 그런 갑작스런 결정에 짐 싸놓고 대비하진 못해도 충격을 받지는 않을 정도의 준비는 되어있었다.
아무리 간다간다 했지만 그래도 당장 낼모레라니.....

"Tunisia! 햇볕 나고, 아침밥 저녁밥 제공하는 지중해를 앞에 둔 호텔이 4식구에 일주일간 천 파운드........ 가자!"

붙박이장 서랍 속에 오랫동안 눅눅히 뭉쳐진 여름옷들을 대충 꺼내놓고 짐을 꾸렸다. 샴푸도 넣고 치약 칫솔에 우리 집 목욕탕의 대들보 같은 존재, 때밀이 타올도 빠뜨릴 수가 없다.
정말 이번 해처럼 겨울이 길게 느껴진 해도 없었던 것 같다.

튜니지아가 아프리카 국가인지 아랍 국가인지 통 세계지리에 무지한 사람인 나는, 그저 등짝 지질만큼 따끈한 햇볕이 난다하니 일단 그곳에 도착해서 직접 확인해 보자는 심산으로 짐을 꾸리기에만 바빴다.

정말 오랜만에 접하는 더블린 공항은 인파로 인해 곧 터져버릴것만 같았다.
행선지 모나스티어(Monastir)앞에 체크인 하기 위해 긴 줄 맨 끝에 달려 짐과 아이들을 지키고 서서 줄이 짧아지기만 기다리고 있다.
머피의 법칙이라던가! 내가 선 줄은 어딜 가나 느려터지는 게 정말 알 수가 없다.
어떻게 그렇게 꼭 느린 줄만 정확히 골라 서는지 모르겠단 말이다.
성질 급한 놈이 우물 판다고 성질같아선 접수하는 직원 밀어내고 내가 직접 체크인 하겠다고 나서고 싶지만, 하여간 느긋하고 여유로운 마음으로 기다릴 줄 아는 사람이 언제나 되려는지 스스로를 한심스러워 하기도 하며.....

세시간에 걸쳐 튜니지아의 모나스티어 공항에 도착하여 패스포드 컨트롤 앞에 또 줄을 섰다. 잘 고르겠다고 고른 줄, 역시나 가장 느린 줄 뒤에 서고 말았구나.

어느 나라를 가든 여권을 내밀 땐 죄지은 것 없이 움츠려들게 마련인 것 같다. 여권에 도장을 받고 짐을 찾고 세관을 통과하는 길이다.
세관원은 여권을 형식상 들여다보더니 "나르띵 뚜 디끌레르?" 라고 말한다.
"pardon?(뭐라구요?)"
"나르띵 뚜 디끌레르!" 세관원은 다시 재차 말했다.
데이빗과 나는 조금은 당황한 채 이게 무슨 말인가 서로에게 의견을 묻는 눈빛을 교환했지만 피장파장이었다. 좀 전 여권 검사원은 우리 앞에 선 사람에게 씹고있는 껌을 보고 자기도 좀 달라고 했었는데 이 사람도 우리에게 껌을 원하는 걸까!
이 나라는 가난해서 껌이 없는 걸까!
"나르띵 뚜 디끌레르!"
"아~ 네, 그렇습니다. 낫팅 투 디클레어(Nothing to declare. 신고할 것 없습니다.)"
"탱큐, 바이 바이"
"탱큐, 바이 바이"

공항문을 나서자 어스름한 저녁이 살며시 내려앉고 있었고 산들바람이 더운 나라만이 풍기는 그런 이국적인 향기를 싣고 여행객의 설렘을 부추긴다.
어디를 가던 첫 눈에 비치는 그 나라의 첫인상은 공항 문밖에서 이루어진다.
지중해 국가들 대부분이 그렇듯 하얗게 칠해진 담장 밑에 진분홍의 종이꽃 같은 부근빌라가 흰 바탕 위에 풍성하고 탐스럽게 피어있었다. 간간이 가시 돋친 선인장들이 과장되게 손잡이가 강조된 토기 항아리 속에 담아져 담벼락에 놓여있는 모습도 볼 수 있었다.
나는 이 자연의 향기를 추적해보려 한참을 킁킁거리다 드디어 희미한 기억을 정확히 되살려낼 수 있었다.
정말 오랜만에 맡아보는 메디테라니안(지중해)의 봄의 향기.
이건 바로 오렌지 블라썸(Blossom. 果樹꽃)만이 뿜어낼 수 있는 달콤하고 싱긋한 향기중의 향기다.
스페인에서도, 봄이면, 무더운 여름을 걸쳐 가을의 과실을 준비하느라, 오렌지와 레몬나무들이 일제히 꽃을 피우기 시작했었다. 그 손톱만한 크기의 희미한 연분홍빛을 띤 하얀 블라썸들은 보기에도 사랑스러웠지만 그 향기는 사랑스런 꽃모양보다 수십배 더 강렬한 향을 뿜어내곤 했었다. 우리집은 오렌지 밭 중간에 있었고 나는 두 해 동안 봄이면 아사르 향(Azar.오렌지 블라썸의 스페인어) 속에 취해 지내곤 했었다. 결국 이곳 촉촉한 나라 아일랜드에 정착하여서도 집 이름을 아사르 라고 지을 정도로 오렌지 블라썸 향기를 좋아했었다.

지중해를 낀 이곳 튜니지아 역시 오렌지 밭이 광활하게 펼쳐져 있었다. 오렌지밭이 있는 나라라면 올리브 나무를 또한 빠뜨릴 수 없다.
그리스 신화의 한 신이 지중해지역에 내려준 선물이라고 알려져 있기도 한 이 올리브는 메디테라니안의 상징이라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닐 것이다.
버스에 올라타고 공항을 벗어나자마자 고목의 분재들처럼 굵직하고 아담한 올리브 그루들이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오렌지나무에도 올리브나무에도 밤의 색깔이 내 눈을 속이며 점점 짙게 드리워지고 있었다. 나뭇가지 사이사이 구석구석 빈틈없이 검정색을 메우는 광경을 나는 빠짐없이 목격했다.
그렇게 밤은 능숙한 마술사처럼 내 눈을 속인다. 어둠이 얼마나 느린 속도로 물들어지는지 가늠하려 정신 가다듬고 어둠의 형체를 관찰하지만 그건 늘 소용없는 일이다.
내 눈은 몇 분이 지난 후에야 항상 좀 전보다 더 어두워졌다는 사실을 늦게서 알아차리니 말이다. 마치 머리카락이 자라는 현상은 육안으로 식별하기 불가능하지만 머리카락이 어느 정도 자라고 나서야 정말로 길게 자랐다는 사실을 알 듯이 말이다.
해가 뜨고 지는 하루 하루를 근 34년간 맞이하고 보내며 살아왔지만 이렇게나마 밤이 낮을 덮는 기적적인 자연의 현상을 고스란히 체험해 본 경험이 놀랍게도 손에 꼽을 만큼 적다는 사실이 새삼스럽다.
옥색 바탕 하늘에 아무렇게나 펼쳐진 하얀 솜구름들은 밤의 색을 가장 많이 그리고 빨리 흡수해 버린 것처럼 검정색으로 변해버렸다. 그건 마치 먹물을 흡수한 솜덩이들 같았다. 올리브 밭 중간 중간에 정사각형 집들이 띄엄띄엄 놓여있고 가끔씩 튜니지아 아낙네들은 머리와 온몸을 둘러쓴 체 삼삼오오 짝을 지어 걸어가는 모습도 볼 수 있었다.
드디어 하늘에는 비너스 성이 벌거벗은 전구처럼 맨 먼저 빛을 발하기 시작하며 밤의 세상을 알렸다.
근 1시간 반 동안에 걸쳐 목적지 하마메트(Hammamet)의 예약된 호텔에 도착할 수 있었다. 별이 세 개 반이라는 호텔.
별이 세 개면 세 개고 네 개면 네 개지 세 개 반은 또 뭘까.......
부페식의 식당에서 내가 무얼 먹고있는지도 모른 채 얼떨결에 배를 채우고 지정된 방에 올랐다.
지상 2층 건물의 작은 이 별 세 개 반짜리 호텔은 엘리베이터가 없었고 그 말은 짐 보따리를 계단을 이용해 낑낑거리며 2층까지 끌고 가야한단 말이다.
마블 바닥과 마블 테이블 심지어 침대조차도 시멘트 바닥이었고 매트리스를 침대 형상의 시멘트 위에 올려 논 희한한 방이었다.
카페트가 아닌 마블이라, 더운 나라임이 틀림없구나.
짐을 대충 풀어놓고 때밀이 타올을 챙겨든 나는 목욕탕에 물을 받았다.
콸콸 쏟아지는 더운물 찬물, 아무렴 그렇지, 어디가나 나는 마냥 한국여자 그저 뜨거운 물 잘 나오고 물 잘 빠지면 됐어.

세계 문명의 시초 아랍!!!
아랍인 튜니지아인들은 태양빛에 잘 그을린 피부색이며 이들 아랍 남자들은 외국인 여자들을 무척 호감스럽게 바라본다. 특히 금발머리 여자라면 정말 사족을 못 쓸 정도로 좋아하며 귀찮게 따라 붙는 사례가 많으니 조심하라고 한다. 일부다처제가 있었던 이 나라는 예전엔 낙타로 여자를 사기도 했다고 한다. 지나가는 말로 튜니지아인들은 주미를 보고 낙타 3000마리를 주겠다거나 하는 농담을 하기도 했었다.
낙타가 화폐 구실을 했을 당시에, 낙타가 많은 부자들은 당연히 부인들도 많았을 테고 가난한 사람들은 장가도 못 들었으리라.
이들 언어는 역시 아랍어를 사용하고 있었고 언뜻 본적이 있었던 아랍 문자를 이번 기회에 세심히 관찰할 수 있었다.
아랍어 문자는 정말 예술적인 디자인처럼 부드러운 곡선을 이은 아름다운 글자이다. 어쩌면 저런 곡선이 뜻을 가진 글자 일수가 있을까 하는 의구심마저 든다. 우리 한글이 과학적인 글자라면 아랍문자는 예술적인 글자라고 말하고 싶다.
로마인은 알파벳을 창시했고 아랍인은 아라비안 숫자를 만들어 냈다.

튜니지아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보면 로마제국의 지배를 받기도 했던 나라이다.
로마 제국 때 로마의 지배를 받지 않은 나라는 거의 없었으므로 새삼 말할 필요도 없겠지만. 한때는 프랑스의 식민지였고 지금도 프랑스어는 제 2 외국어로 사용하고 있으며 많은 사람들이 프랑스어를 잘 구사하고 있었다. 아랍어는 언뜻 듣기에 프랑스어나 스페인어와도 비슷하지만 내가 듣기로는 프랑스어보다 훨씬 듣기 좋다는 것이다.
물론 내가 프랑스어를 듣기 싫어한다는 편견이 개입돼 있는 탓이기도 할 것이다. 특히 스페인어와 아랍어는 유사한 것들이 무척 많았다. 물론 아랍 모로들이 스페인을 장작 600여년간이나 장악했다하니 당연한 일이기도 할 것이다.
오렌지 블라썸 "아사르"도 아랍어로는 똑같은 "아사르"였다.
아랍 국가 튜니지아의 건물들은 아랍 특유의 디자인들로서 정말 환상적이고 독특하며 우아하다.
아치형의 곡선을 많이 사용하고있으며 특히 흰색 혹은 파란색 대문마다 검은 점으로 디자인된 무늬들이 무척 인상적이었다.
이들 아랍인들 튜니지아 사람들은 우리 한국인들처럼 정이 많은 사람들이라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어쩌면 그건 온전히 내 주관적인 느낌일 것이다. 나는 이곳에서 우리 큰삼촌을 닮은 사람, 막내삼촌을 닮은 사람을 보았다는 간단한 이유에서였다.
역시 멀지 않은 옛날 우리 한국인들처럼 관광객을 상대로 바가지 씌우는 것도 너무 일반적인 사례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런 모습들이 그다지 낯설게 느껴지지 않았음은 고향생각 때문일까.
물건의 제값 열 배 정도나 높이 불러놓고 특별히 싸게 해 주겠다고 반 가격을 부른다. 손님과 근 30여분의 승강이 끝에 결국은 못 이기는 척 내어 주는 튜니지아 장삿꾼들.
"내 친한 친구여. 내 가게에 오셔서 나를 기쁘게 해 주세요. 물건은 안 사도 좋으니 나를 행복하게 해 주세요" 라고 호객행위를 하며 억지로 끌고 들어가고, 일단 끌려 들어가면 빠져나오기가 힘이 드는 건 물론 나와도 맥이 빠진다.
"당신 이름을 아랍어로 써 드릴테니 이름을 가르쳐 주세요" 해놓고 이름을 대 주면 그 곡선의 우아한 아랍어로 휘저은 다음 손목에 수갑처럼 팔지를 채워준다. 그리고 이 팔찌에 당신 이름을 아랍어로 써 주겠다고 하며 팔지를 팔려 안간힘을 써댄다.
생활터전과 문화가 다른 이곳 사람들이 신선함으로 다가왔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시간적이나 경제적이나 이런 상거래는 정말 피차간에 피곤하고 비건설적이라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다.
화폐단위 "디나"는 일주일간 머물다가는 외국인들에게는 낯선 것이므로 특히 잔돈을 받을 때 어지간히 신경쓰지 않으면 속아넘어가기 십상이다.
지폐로 잔돈을 거슬러 줄 수 있는 액수이면서도 일부러 동전 돈을 거슬러주어 사람을 헛갈리게 한다. 지폐는 정확한 숫자가 써 있으니 구분하기 쉽지만 동전은 크기도 비슷하고 어떤 것이 반 디나이고 1 디나인지 선뜻 구분하기 어려우므로 이런 속임수를 쓰려는 사람들이 종종 있었다. 어디를 가나 어떻게해서 관광객들 주머니에서 돈을 빼낼 수 있을까 하는 궁리가 천지인 사람들이었지만 그런 대로 그들에게서 정을 느낄 수 있음은 그들이 아이들을 대하는 모습에서였다.
처음 보는 사람들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죠슈아나 주미를 곧잘 안고 이런저런 말을 붙였다. 이런 모습은 흔히 볼 수 있었으므로 대수도 아니라고 할지 모르나 예를 들어 독일에서는 거의 있을 수 없는 이야기다. 내가 개인적으로 독일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이유도, 그들은 질서와 체계, 법을 중시하는 도덕적인 국민성과 지나치게 이성적이면서도 한정된 고정관념을 가진 사람들로서 따뜻한 정을 느끼기 힘들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이곳 서양 사람들이 휴가를 떠난다 함은 햇볕을 보기 위함이다. 그만큼 태양의 볕에 굶주린 사람들은 태양을 보고 쬐고 살갗이 삶은 가제색이 되도록 볕 아래에서 몸을 굴린다.
햇볕에 잘 그을린 피부는 어쩌면 부와 미의 상징이기도 하다. 나는 이만큼 여유가 있어 외국에 나가 햇볕에 살갗을 태우고 왔고 이렇게 검게 잘 그을린 미모를 갖추었노라고 말하고 싶어한다. 무엇보다도 백짓장처럼 하얀 피부를 부끄러워하며 특히 여자들은 허연 다리를 내놓기 무안해 한다.
그러니 짧은 시간 안에 햇볕에 그을리기 위해 이들 관광객들은 호텔 수영장 주위에 마냥 해를 보고 누워 뼛속까지 스며드는 해를 즐긴다. 그런데 만약 햇볕을 보기 위해 떠난 여행에 구름이 끼거나 비라도 온다면 그건 정말 재수없고 아까운 휴가일 수밖에 없다. 특히 유럽에서 영국인, 독일인, 아일랜드인들은 이 햇볕 쬐기 휴가여행을 무척 선호하는 편이다.
이 중에서 독일인들의 햇볕 쟁탈전은 무척 유명하다.
예를들어 아이리쉬들은 햇볕도 쬐고 실컷 마시고 놀자는 객기를 발동하여 새벽이 될 때까지 마시고 놀고 떠들어대지만 계산적이고 치밀한 질서의 독일인들은 적당한 시간에 취침하고 새벽같이 기상한다.
이유는 햇볕이 잘 들고 좋은 자리를 선택하려면 남들보다 빨리 나서야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들은 새벽같이 일어나 썬베드 의자에 타월을 깔아 임자가 있는 의자임을 알려 내 자리를 찾아놓는다. 이들 독일인들과 영국인들 혹은 프랑스인들은 역사적인 세계 2차대전을 봐서도 그렇고 그다지 피차간에 좋은 심성으로 봐주지 않는 차에 휴양지에서 일어나는 썬베드 의자 쟁탈전은 정말 치열하다.
마시기 좋아하는 아이리쉬들 역시 이런 독일인들의 처사를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것은 당연한 사실.

어느 이른 새벽에 술에 잔뜩 취해 호텔로 발걸음을 옮기던 이 아이리쉬는 새벽부터 썬베드에 수건이 깔린 걸 보고 화딱지가 났다. 이 아이리쉬 파디는 수건을 모두 걷어 수영장 속에 쳐 넣어 버렸고 이에 화가 난 독일인들은 그 다음날 수건을 썬베드에 꽁꽁 묶어 놓았다. 이번에도 아이리쉬 파디 역시 참을 수 없어 수건이 묶인 썬베드를 통째로 수영장에 쳐 넣었다고 내 친구는 이야기한다.

우리가 묵는 호텔은 주로 영국인들과 아이리쉬들이며 독일인이나 프랑스인들은 지정된 다른 호텔에 묵는 것이 상례인 것 같았다. 아예 패키지 여행사 담당은 독일인들과 햇볕 쟁탈전이 없을테니 안심하고 썬베드를 이용하라 권하여 웃음이 나오기도 했었다.
호텔에는 의례 키즈 클럽(Kids club)이라는 게 있어서 아이들을 도맡아 놀이를 제공하므로 일일이 아이들 뒤꽁무니를 쫓아다니며 돌보지 않아도 되는 우아함도 누릴 수 있었다.

수영장을 중심으로 썬베드 의자에 누워 집걱정 밥걱정 할 일없이 하루종일 뒹굴어가며 계획했던대로 책을 읽었다. 나 역시 피부가 흰 편이어서 오래전부터 늘 검게 그을린 피부를 선호하곤 했었던 차였으나 검게 그을린 피부보다는 따뜻한 햇볕을 구들방처럼 쬐며 포근함을 느낄 수 있음에 만족해했다.
남자고 여자고 이불호청같은 흰둥이들은 벌겋게 구워졌음에도 아랑곳하지않고 조금이라도 태우기위해 안간힘을 쓴다.
이들 특히 백인 여자들의 피부는 이미 탄력과 윤기를 잃은 지 오래인 것 같다. 워낙 자외선에 완전 노출시켜 피부를 말리니 당연히 얼굴엔 주름이 지고 탄력을 잃게 마련이다. 모두들 알고있는 사실이지만 그래도 조금이라도 검게 그을린 얼굴을 당장 갖고싶어 안달을 한다.
이렇게 흰둥이 관광객들은 햇볕에 나와 하루종일 굽는 반면에, 이곳 튜니지아인들은 속내의를 입고 셔츠와 양모 스웨터를 받쳐 있은 위에 가죽 코드를 단단히 입고 있는 것이 정말 신기해 보일 정도다. 낮기온 25-27도 사이에 양모 스웨터에 가죽코트를 입는 사람이 있고 거의 벌거벗은 채 햇볕에 누워있는 사람이 있다는 말이다.

이틀째 되는 날 나는 같은 호텔에서 묵는 두 동양인 여자를 발견했다.
외국에서 만나는 동양 사람은 대번에 중국인인지 한국인인지 혹은 일본인인지 가리기가 용이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두 여자가 한국여자라는 사실은 금방 알아차릴 수가 있었다. 여자들은 군데군데 노란 물을 머리에 들였고(나도 몇 주전 군데군데 하이라이트를 했다.) 앞축이 하늘을 향한 자신의 발보다 훨씬 커다란 모양의 신발을 신고 있었으며 식사시간에는 고개를 테이블에 푹 숙인 채 한 손으로 포크질을 하고, 걸을 땐 어깨를 구부정한 체, 무표정한 굳은 표정으로 걷는 여자라면 틀림없는 한국여자라고 말해도 될까.
그들과 인사라도 해 보고 싶었지만 왠지 내 눈빛을 피하는 듯 하여 굳이 말을 붙이진 않았다. 나름대로 조용하고 편안한 휴가를 보내고 있는 듯하여 괜스레 내 마음도 안심이 되었다.

두 흑인 여자도 그 호텔에 묵었다. 타이오와 아비는 자매지간으로 동생 타이오는 무척 키가 크고 덩치가 좋았으며 언니 아비는 상대적으로 몹시 작은 키의 여자였다. 몹쓸 고정관념이 나한테도 언제부터인가 스며들어 흑인들은 백인들보다 덜 지적이리라는 생각이 들었다는 걸 부정하지 않겠다.
지정된 식탁에 그들과 함께 앉았고 자연스레 이야기를 주고받게 되었다.
아비는 BBC방송국에서 제작하는 드라마의 배우였고 타이오는 세계 관광 크루즈에서 일했다고 한다. 가만 생각해보니 Bill이라는 우리나라 수사반장같은 프로그램에서 본 듯도 한 얼굴이었다. 아비는 고등 교육을 받은 무척 지적인 여자였다. 아비가 말하는 영어는 정말 듣기에도 우아했고 문장 구성도 무척 세련되게 말하는 여자였다. 그렇다. 이 영어는 옥스퍼드 영어다. BBC 라디오 방송드라마의 성우로도 일한다고 했다. 타이오는 강한 만체스터 악센트였지만 외모처럼 씩씩하게 말하는 게 매력이었다. 타이오는 크루즈(Cruz)에서 세계를 항해할 때 한국에도 잠깐 들렀노라고 하며 일하던 당시에 있었던 재미있는 에피소드로 자리를 밝게 했다.
미국은 세계에서 가장 파워풀한 강대국이고 문명 또한 가장 많이 발달된 나라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얼마나 멍청한지 한심스럽다는 이야기가 나왔다.
그들이 가장 많이 하는 질문 중에 하나가 이 계단이 위로 올라가는 건가요? 라는 질문이란다. 계단을 보고 위로 올라가느냐는 질문이라니 그럼 계단이 어떤 역할을 하는지 모른다는 이야기인가.
또 하나는 미드나잇트(Midnight.한밤중 12시)식사가 몇 시에 있느냐고 묻는단다.
미국인들은 그저 24시간동안 먹어대므로 한밤중에도 부페식당이 차려진다고 했다.
타이오가 영국인이라고 말하면 영국에 흑인이 있다는 걸 무척 의심스러워하며 못믿어하고 그럼 집에서 이곳 크루즈까지 어떻게 출퇴근하느냐고 묻는다고 한다. 타이오는 이런 무식쟁이들이 한심하여 나는 아침마다 헬리콥터를 타고 대서양을 건너 출근하며 밤늦게 또 헬리콥터를 타고 퇴근한다고 했더니 그들은 정말 그 말을 믿고 아~ 그래서 헬리콥터 소리가 났었군요 하더란다. 유럽이 미국에서 얼만큼이나 먼 거리인지 아시아가 어디 붙었는지 전혀 감조차도 잡지 못하는 사람들이라고 했다.
우리는 타이오가 미국인들의 에피소드를 말할 때마다 배꼽을 잡고 웃어댔다.

아비는 한글이 어떻게 생겼는지 궁금해했고 데이빗은 한글이 얼마나 과학적으로 만들어진 누구나 쉽게 배울 수 있는 글인지 설명하기 시작했다.
나는 ㄱ ㄴ ㄷ을 써서 영어로 토를 달아주고 ㅏ ㅑ ㅓ ㅕ 도 써 주며 대강 설명해 주었으나 영리한 아비는 무척 신기해하며 자신의 이름을 그 자리에서 써 내보였다.
그리고 우리가 묵는 호텔 이름 Dalia를 "다리아" 라고 똑바로 써냈다. 아비가 총명한 이유이기도 했지만 정말 한글은 과학적으로 만들어진 훌륭한 문자라는 게 다시 금 실감나게 했다.
간단히, 한글을 창시한 세종대왕에 대해서도 말해 주었고 아비는 무척 신기하게 귀담아 들었다.
나이지리아 부모를 둔 이 두 흑인 영국인 자매는 아프리카의 실상을 이야기해 주기도 했는데 정말 생각보다 심각한 아프리카의 생활이 무섭게 다가왔다.
나이지리아 국민들은 고등 교육을 받은 사람들이 상당수이지만 워낙 부패된 정부여서 온 국민이 어렵게 살고있다고 한다. 뇌물이 법인 이 나라는 살인죄를 지었어도 돈을 얼마큼 내느냐에 따라 죄 값이 달라진다고 한다. 가끔씩은 도둑이 현장에서 잡히면 산 도둑 몸에 휘발유를 붓고 불을 질러 그 자리에서 화장시키는 일도 흔하 다고 한다. 타이오는 그런 광경도 직접 목격했다 하는데 피부가 터지며 타는 모습을 봤다니......
나이지리아에서 백인은 아주 우월한 사람들로 처신하고 나이지리아인들 스스로도 그들을 우수 민족으로 받든다고 한다. 영국의 식민지였던 나이지리아인들의 그런 백인대접은 흔히 볼 수 있는데 한번은 수퍼마켓에서 타이오와 백인 여자는 이런 일화가 있었다고 한다.
물건값을 치르기 위해 길게 줄을 서서 기다리는 중 어떤 백인여자 하나가 그 긴 줄을 무시하고 당당히 카운터에 서더란다.
타이오는 어이가 없어 그 백인여자를 불러 세웠고 "당신 지금 뭐 하는 짓이요. 이렇게 줄서서 기다리는 게 눈에 안 보이요? 당장 뒤로 가서 줄 서시오!"
너무 당황한 그 백인 여자는 곧 뒤로 가서 줄을 섰다 하는데 더 웃기는 이야기는
그 수퍼마켓 안의 모든 나이지리아 흑인들은 타이오를 이상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한다. 백인은 우월하니 당연히 특별대접을 받아야 하는데 감히 흑인이 백인에게 저렇게 말해서는 안된다는 뜻의 눈빛이었다고 하니.....
나는 잠깐 만약 일본인이 이런 처세를 한국에서 했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보나마나 뼈도 못추리게 몰매 맞았겠지!

사흘째 되는 날은 낙타 여행을 갔다.
얇은 티셔츠차림의 우리 관광객들에 비해 낙타 주인은 두꺼운 스웨터와 자켓을 걸쳐입은 검게 그을린 얼굴에 누런 니코틴이 이빨 가장자리마다에 물든, 찌들은 삶이 여실한 중노인이었다.

"그래 둘이면 됐소. 나는 애들이 여섯이나 된다오. 여섯 자식들에 부인 둘을 데리고 살려니 내 삶이 말이 아니오."
"부인을 둘이나 데리고 살다니 어지간한 재력가인가 보군요"
"아니요. 아니요. 식구들을 먹여 살리려니 정말 형편이 말이 아니지.... 당신은 어느 나라 사람이요? 영국인이요?"
"아니요. 아일랜드에서 왔어요"
"오. 그래. 아이리쉬들은 정말 재미있는 사람들이지. 난 영국인들과 독일인들을 싫어한다오. 영국인들은 거만하고 독일인들은 안목이 좁은 사람들이지. 아이리쉬들이 정말 최고요. 당신 부인도 좋은 사람인 것 같구려"

이 정도라면 이 낙타 주인은 팁을 뜯어내려는 수작이 여실히 드러난 셈이다.
누런 니코틴의 이빨은 신세타령에 동정심을 구하고 아이리쉬에 대한 호감의 표현으로 점수를 따내려고 하고 있었다.
돈을 조금이라도 더 벌기 위하여 안간힘을 써 대는 그 중늙은이가 측은하기도 하고 재미있기도 하여 팁을 내주었다. 오렌지 밭을 지나온 짧은 낙타 여정을 끝마친 뒤였다.
오렌지 밭 담장나무는 가시가 길고 사납게 돋친 커다란 선인장 나무들이어서 도둑으로부터 보호할 수 있는 담장역할을 충실히 해 내겠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현기증이 날만큼 아찔한 낙타등에서 내려오니 안도의 한숨이 절로 쉬어진다.

닷새 째 되는 날은 로마인들이 건축한 도시를 방문하였고 정말 말로만 듣던 로마제국의 위대한 흔적을 조금은 맛볼 수 있었던 기회였던 것 같다.
무너진 도시 carthage(카르타고. 아프리카 북해안의 고대 도시국가로서 로마에 멸망) 짙은 에메랄드빛 지중해를 앞에 두고 로마인들은 현재의 레져센터같은 휴양지를 그 곳에 건설했다. (그들의 손에 의해 파괴되었다.) 지금은 건물의 흔적만 겨우 남았지만 미니어쳐 모형도를 보니 실로 대단한 디자인과 설계가 어우러진 문명의 작품이었다.
20M는 족히 되는 마블 기둥 하나하나에 꽃 이파리같은 조각을 해 넣었고 바닥과 벽에도 모자이크를 넣어 화려하고 정교함을 더해주었다. 현대 문명이 한 두 달만에 뚝딱하여 지어낸 콘크리트 건물과는 비교도 안될 만큼 우아하고 고급스러운 예술작품이었다. 당시 로마인들은 이렇듯 훌륭하다못해 완벽한 예술품을 지어놓고 생각했을 것이다. "우리는 문명의 최고자이다" 과연 그보다 더 발달된 문명은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음이 너무나 당연했겠다.

끝없이 펼쳐진 감람나무(올리브)밭을 지나며 관광 가이드는 말한다.
"올리브들이 결실을 맺으면 모든 여성들은 밭에 나가 올리브들을 채집합니다. 이 일은 전통적으로 여자들만이 하는 일이지요. 왜냐면 날씨가 쌀쌀해 지는 계절이므로 추운 밭에서 여자들을 일시키고 대신 남자들은 따뜻한 집안에 남아있지요" 진담인지 농담인지 구분하기가 쉽지 않지만 정말 우스운 이야기여서 다들 웃고 말았다.
겨울이면 혹독한 추위는 물론 없지만 사하라 사막에서 불어오는 밤바람은 무척 사납다고 한다. 월동준비를 하는 남자들은 따뜻한 양모 이불을 마련하고 그것으로도 막을 수 없는 추위를 생각해 살이 많이 찐 뚱뚱한 여자를 아내로 맞이하여 잠자리를 데운다나?

그저 할 일없이 수영장 옆에서 뒹굴다 때가되면 식사하고 또 뒹굴다 때가되면 또 식사하고, 걱정은 뱃살 늘어나는 일 뿐이다. 조금은 헐렁했던 바지가 꼭 끼어 입기에 부담스러울 정도이다.

이곳 오렌지를 까서 속을 보면 노란색이 아닌 순수한 오렌지색이다. 핏빛을 연상하기도 하는 이 붉은 속살은 내가 맛본 오렌지 중 가장 달콤하고 시원한 맛이었다.
저녁식사(부페) 때마다 쌓여있는 오렌지를 아비와 나는 두세 개는 보통 6개씩이나 먹을 때도 있었다.

순 양모 카페트가 특산품인 이 튜니지아에서 잘 고르면 양모 수공 카페트를 아주 저렴한 값에 살 수 있다. 카페트의 품격은 크기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얼마나 촘촘한가의 땀 수에 따라 결정된다. 작은 카페트가 큰 카페트보다 스티치 수가 많을 수도 있는데 이런 경우 작은 카페트의 가격은 당연히 비싸진다. 보통 카페트 하나는 한 사람의 노동력으로 6-9개월간의 수공기간이 필요하다고 한다는데 이 아낙네들은 하루에 겨우 수 디나의 낮은 임금으로 일하는 사람들이다.
낙타 가죽제품 또한 많으며 여성 핸드백이나 기타 가죽제품도 비교적 저렴한 가격이다. 하지만 디자인이나 품질은 가죽에 비해 못 미치는 편인 것 같다. 오렌지색 낙타가죽 핸드백을 20 디나에 나도 한 개 사왔다. 환율에 익숙지 않은 나는 그저 데이빗을 붙잡고 그게 환산하면 몇 파운드나 되는데? 라고 묻기에 여념이 없다.
20 디나면 13 파운드 정도 할까! 원화로는 15,000원 정도?

튜니지아의 골목골목은 영화 속의 장면처럼 운치있고 아름답다. 사방 온통 흰 담벽과 넓적한 돌들을 이어만든 골목 바닥은 무척 깨끗해 보인다.
이들 튜니지아 머슬림들은(Muslim)은 하루 6번의 기도 시간을 갖는다고 한다. 종교 축제 또한 많으며 그 중 라마단(Ramadan)은 아주 유명한 것 같다. 하루종일 굶은 후 오후 6시 이후부터 먹기 시작하는 축제(?)이다.
우리가 들른 가게들은 6시 예배식에 참석하기 위해 문 닫을 준비를 하곤 했었다.
여기저기서 흘러나오는 아랍 대중가요는 어쩌면 우리나라 뽕짝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흥얼흥얼 느려 빼거나 상여꾼의 궁상맞은 소리를 듣는 듯도 하여 신기하였다.
타운의 겉모습은 어쩜 우리 한국 10여 년 전 모습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하지만 도로는 무척 한산하다. 차들이 그다지 많지 않았다. 모든 담들은 흰색을 칠했고 대문이나 창문은 파란 하늘색(혹은 흰색)을 칠해 아주 산뜻한 느낌이 든다. 흰색은 햇볕을 반사하기 위함이고 파란색은 환영의 뜻이라고 한다. 건물마다의 창은 길고 좁은 아치형이고
이것은 태양 빛을 조금이라도 덜 받고 시원한 집을 만들기 위함이다.
튜니지아 여자들은 구리빛 피부의 건강해 보이고 섹시한 매력적인 여자들이다. 이들 대부분의 옷차림은 검은색에 두꺼운 겨울 코트를 입고 있었다. 하지만 길거리에는 여자들보다 남자들이 훨씬 더 많아 그다지 많은 여자들을 보진 못했다.

내가 튜니지아에 가장 좋은 인상을 느낀 것은 이들 아랍인들의 선한 웃음이다. 구릿빛 피부에 상대적으로 하얀 이를 드러내며 활짝 웃는 이들 튜니지아인들의 모습이 가장 눈에 들었고 또한 오랫동안 잊지 못할 것이다.
이메드, 나노미, 살람, 모하메드, 카를로스의 이름을 가진 사람들 그리고 썰탄, 알라딘, 신밧드 등의 동화속의 궁전같은 건물들.

그리고 아사르의 향기!

(총 : 7 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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