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번호 72  등록일 : 2004-10-13 오전 9:09:19

벙어리의 방문
글 : 허신영 ()

사람들이 말하길, 세상이 점점 더 각박해지고 있다고 말한다.
이 “각박” 이란 단어가 대표하는 사회성이야 한두가지의 예로 들 순 없겠지만
서로 믿지 못하는 “불신의 사회” 란 뜻을 한마디로 표현하는 듯 하다.

바깥양반은 며칠째 출타중인 어느 날 저녁, 식사를 마치고 아이들을 잠자리에 막 밀어넣고 방을 나오는 중이었다.
현관문 두드리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힘없는 아이들과 나 혼자인데 하는 생각을 하며 조금은 쭈뼛한 마음으로 현관을 향했다.

문을 여니, 50대 중반으로 보이는 희끗희끗한 흰머리의 낯선 남자가 서 있다.
해가 거의 기운 후여서 자세히 보이지는 않았지만, 이 중년으로 보이는 남자는 대뜸 내게 종이쪽지를 내밀었다.
종이를 보호하기 위해 비닐로 덮어진 쪽지였다.
대충 읽어보니, “나는 벙어리입니다....... 어린 딸이 많이 아픕니다..... 돈이 필요 합니다” 뭐 이런글이 적혀있었다.

아일랜드에 살면서 아주 처음 있는 일이었다.
첫 문장을 읽으며 내게 가장 먼저 떠오른 생각은
“칫~ 이건 뭐야! 동냥하러 온 사람이네... 벙어리라고? 동냥할려고 거짓말 하는것이겠지. 딸이 아프다고 하는것도 아주 전형적인 수법이고....”
나는 쪽지의 내용을 읽기보다는 이 일을 어찌 대처할까 내 생각에 더 치우치면서, 남자를 다시 쳐다보았다.

작은 체구에, 선량한 듯도 하고 약간은 서글픈 듯도 한 미소를 지으며 내 눈과 맞대었다.
그는, 그리고 한손에 든 그림들을 한 장씩 펴가며 내게 보여주기 시작하였다.
강아지그림, 어린 여자아이의 모습, 말그림 등 연필로 데생한 듯 한 것들이었다.
흑백인것도 있고 물감으로 칠해진것도 있었다.
이 그림을 판다는 것인지, 팔면 얼마에 판다는 것인지... 그냥 적선을 하면 한 장 주겠다는 것인지....
나는 잠깐 기다리라고 손짓으로 말하고, 안으로 들어와 지갑을 뒤졌다.
그냥 작은 지폐 한 장을 주어 보내려고 말이다.
그가 동냥을 하러왔던 그림을 팔러왔던, 정말 벙어리이고 딸아이가 정말로 아프던 그것이 사실이든 거짓이든 내 관심밖이었다.
그림에도 물론 관심은 없었다.
그렇담 쪽지를 읽으며 첫 번째 떠오른 의심을 불구하고, 왜 나는 그에게 돈을 주기 위해 지갑을 뒤졌을까!
내게 두 번째 든 생각이 나의 행동을 지배하였기 때문이다.

설령 그가 거짓으로 꾸며, 멀쩡한 사람이 벙어리 시늉을 한다해도, 건강한 딸아이, 아니 있지도 않은 딸아이를 시나리오에 넣었다고 해도 난 그에게 돈을 줘야한다고 생각되었다.

다시말해 그가 사기꾼이라 하여도, 분명한 것은, 본인 스스로를 벙어리라고 소개하고 병든 딸아이를 위해 돈이 필요하다고 말하고 있는 중년의 남자가 내 앞에서 내게 도움을 청하고 있다는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든 저런 이유로든 돈을 적선함에 있어, 나에게 변해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정말로 불쌍한 사람을 도왔다는 느낌이고 생각일뿐, 괜히 속아서 돈 몇푼을 날렸다는 느낌이고 생각일 뿐, 변하는 것은 정작 아무것도 없다.

어떤 이유로든 낯선집의 현관문을 두드리며 늦은 시간에 동냥하기 위해 돌아다닌다면 그 자체만으로도 안타까운 일이며 그는 분명 도움을 절실히 필요로 하고 있음이었다.

한데 하필 내 지갑에는 작은 지폐가 없었다. 그렇다고 동냥 온 사람에게 20 유로짜리 지폐를 적선하기엔 너무 큰 듯 하였다.
나는 다시 현관으로 나가, 내게 오늘 돈이 없으니 내일 오라고 손으로 열심히 말했다.
돈이 없는게 아니라 그에게 줄 만한 작은돈이 없다고 말함이 더 정확하겠다.
그는 괜찮다는 뜻의 손짓을 하며 얼굴에 여전히 웃음을 머금고 방해해서 미안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그가 내일 오지 않을까봐 꼭 내일 오라고 다시 여러차례 손짓을 하였다.
그가 내 손짓을 알아들었을까? 아니 어쩜 그냥 목소리를 내어 말로 했음이 더 나았을지 모를일이다.
그가 돌아서고, 마음이 영 석연치 않았다.
다음날 아침 난 주미에게 어제 찾아온 낯선 벙어리를 얘기해줬다.
주미는 모아둔 용돈에서 2 유로동전을 꺼내 내게 주며 그가 다시 찾아오거든 꼭 전해달라고 하였다.
주미는 아무런 의심없이 벙어리 아빠가 아픈 딸아이를 위해 돈을 구하러 다닌다고 생각하여 몹시 안타까워하는 듯 하였다.

다음날 그는 찾아오지 않았다. 그리고 그 다음날도 찾아오지 않았다.
아무래도 그는 다시 찾아올 것 같지 않다. 동네사람이 아닌바야, 이 시골구석까지 우리집 한 집을 찾아오려고 다시 먼 길을 오진 않을 것이기에 말이다.

세상이 점점 더 각박해지고 있다고 한다.
거짓 사깃꾼들이 가득한 세상이라고 한다.

거짓말하는 사람, 사기를 치는 사람, 그로 인해 내 위치/상태/심경/환경이 나쁘게 변하지 않는 정도라면 속아줄 수 있음도 괜찮지 않을까!
속았어도 속은줄 모를 수 있다면 다행이 아닐까!
속아줄 수 있는 위치가 속여야만 하는 위치보도 다 낫지 않을까!


(총 : 20 건)
2004-10-16 오전 9:25:15 삭제
언니글을 읽을때마다...가슴이 짜~안해요....절대 빈말 아닌거 아시죠???? 갑자기 커다란 충격을 제게 주는게 아니라.....아주 잔잔히 조용히 가슴에 와닿아서...오래토록....여운을 남기는...그런...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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