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번호 60  등록일 : 2004-01-20 오후 10:01:32

여비서
글 : 허신영 ()

오늘부터 데이빗 회사의 여비서가 출근한단다.

사무실이 준비되지 않아 우선 우리집 사무실에서 당분간 함께 책상을 나눠 쓰기로 했다.
온 가족이, 우리집에서 근무하게 될 새 식구에 조금은 긴장되고 조금은 흥분된 상태다.
무엇보다도 '여자'라는 신분에 얼마나 '이쁜 여자' 인가가 가장 큰 관심사다.

여비서는 원래 무릎에 앉혀놓고 일을 시키는 거라는 둥, 장거리 출장갈 때 함께 동행해야 한다는 둥 주위에서도 말들이 많다.
직접 면접을 보고 채용한 데이빗은 자신의 회사에 첫 출근하는 첫 사원이라는 것에 감회가 깊은 듯도 하고, 하여튼 싱글벙글이다.

새 식구맞이에 집안청소부터 하느라 데이빗은 전날부터 부산하였다.

그렇게 오늘 월요일 여비서가 출근하는 날이다.
아이들은 방학이어서 나는 늦게까지 침대에 누워있었다.
부스스 눈을 떴더니 데이빗이 그녀가 첫 출근을 하였노라고 싱글거리며 내게 말한다.
옆에 있던 주미가 한마디 보충설명을 하느라 "아주 이쁜 여자야"란다.
비상이다.
아니 이 집안에 여자가 둘이라니....

나는 죠슈아를 대령시켜 좀 황급한 듯 물어본다
"죠슈아! 사무실의 여자가 엄마보다 더 이쁘더냐?"
죄없는 죠슈아가 영문을 몰라 어깨를 으쓱 하다 생각에 잠기는 듯 하더니
"게임보이 해도 된다고 허락해주면 엄마가 더 이뻐" 란다.
아니 이런 약아빠진 놈 좀 보게나! 다들 작당을 했구나
(갸우뚱!!! 그렇담 게임보이 허락을 해줘야 하나.........곰곰~~)

그렇잖아도 좁은 이 사무실에 세명이서 북적댈일이 걱정이다.
대충 얼굴을 씻고 사무실 문을 열었다.

검은색 정장안에 연보라색 블라우스를 깔끔하게 차려입은 날씬하고 젊은 아가씨가 다소곳이 앉아 서류철을 뒤적이며 일을 보고 있다.
금발인줄 알았는데 머리색은 갈색이며 길다. 주미말대로 이쁘다.

그사이 데이빗은 자리에 없다.
손을 내밀어 악수를 하려니 이름이라도 미리 정보를 받아둘걸 하는 생각이 뒤늦게 든다.
이름이 뭐냐고 물어보기가 민망하여 묻지 않았다.
"Hello. How are you!"
내 인사말이다.

나는 이보다 더 길게 인사를 나눠 본적이 없다.
이번에도 예외일 순 없다.
그래도 그렇게 돌아앉기가 또한 예의가 아닌 듯 하여, 한마디는 더 내놔야 할 듯 하여 "자리가 비좁을텐데 불편하겠어요" 라고 덧붙이고는 난 내 자리에 돌아앉아 상자속의 일과를 연다.

그렇게 하루가 가고 다음날이다.
눈을 뜨니 세상이 조용하다.

여비서 '이머' 때문에 잠옷바람으로 부엌을 드나들수도 없는 자유를 박탈당했다.
샤워를 하고 머리를 빗고 사무실 문을 여니 아무도 없다.
밖을 보니 '이머' 의 차는 있는데 데이빗 차가 없다.
아니 벌써부터 둘이 쏴 돌아다니다니....
새 사무실에 드려놓을 가구를 알아보고 등등 분주한 모양이다.

그렇게 벌써 3주일이 지나고 4주 째이다.
나도 어지간하다.
같은 사무실에 앉아 있으면서도 하루에 두 마디면 충분하니 말이다.
아침에 문을 열고 "하이"
저녁에 퇴근하는 그녀에게 "바이"

'이머'는 상냥하고 이쁘다.
내가 말을 시키지 않는 이상 내게 말을 걸지 않는 그녀가 맘에 든다.
자기 할 일만 알아서 묵묵히 한다.

점심은 샌드위치 도시락을 싸 가지고 와서 부엌에서 함께 먹는다.

'이머'는 이쁜 아가씨답게 하얀 샌드위치를 얌전하게 조심스럽게 오물거려 먹는다.
그리고는 딸기 요거트를 새침데기처럼 스푼으로 조금씩 떠먹는다.
어떤 땐 요거트 대신 귤 한 개를 가져올때도 있다.

그러니, 김치나 된장찌개 같은것을 냄새풍기며 밥과 어구적 거리며 먹어야 하는 나는, 내 부엌에서의 자유도 박탈당했다.

박탈당한 자유는 그뿐만이 아니다.
F 나 S 로 시작되는 단어도 삼가야 하고, 혼자서 징징거리거나, 흥얼거리거나, 데이빗에게 투덜대는 잔소리를 하는 자유도 박탈이다.
잔소리를, 예의 바르고 품위와 격식을 갖춰 해야 한다고 생각해 보라.

오늘은 폴리머 화학자까지 우리집으로 첫 출근한 날이다.
집 사무실에는 도저히 빈 공간을 낼 수가 없어 거실에서 일을 하게 했다.

3주전 오늘, 사무실이 다음주에 준비될 거라 더니 3주가 지난 오늘도 여전히 다음주에 준비된단다.
아마 직원이 더 오게된다면 어쩜 이젠 내 침실까지 내주고 그곳에서 일을 하라고 할 지경이다.

드디어 오늘은 새로 입주할 건물 주인과 계약조건을 논했다고 하니 정말 '다음주'라는 말이 다음주가 되면 충분한 의미를 발휘할 듯도 하다.

그래도 북적대던 이 사무실에 모두 다 사라지고, 나 혼자 우두커니 남을일을 생각하니, 나도 내게 보조가 되어줄 남비서가 있으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내 무릎에 앉혀 일을 시키기란 좀 힘에 부치겠지만 말이다.
여하튼 그렇담 내 박탈당한 자유를 영영 포기해야 되는데 그것은 너무 큰 희생이다..

내가 아는 나는, 사교보다는 자유를 택하리라는 것을 잘 알지만, 나만을 위해 있는 '비서' 꽤 근사할 것 같다는 "한낮의 꿈"을 꿔 본다.


(총 : 158 건)
불곰 2004-01-27 오후 6:38:51 삭제
설명절 전날 고향집 가기전 선물을 사러 마눌님과 함께 사이좋게(?) 백화점엘 갔지요. 지하 주차장 입구에서 쭉쭉빵빵 미녀 도우미 아가씨가 ``어서오세요, 복많이 받으세요`` 하길래 나도 주차 티켓을 받으며 `복많이 받아요 아가씨` 했더니 우리 마눌님 ``나한테는 그렇게 무뚝뚝한 사람이 저아가씨 한테는 상냥하기도 하네``하며 뾰루퉁해 하드라구요.
쇼핑을 마무리 하고 주차장을 나오는데 이번에는 주차티켓 회수하는 사람이 훤칠한 키의 남자드라구요. 주차티켓을 주고 창문을 올리려는데 옆자리에 있던 우리 마눌님 그 훤칠한 남자 주차원한테 간드러지게 한마디 ``새해 복많이 받으세요`` 아 그랬더니 이놈좀 봐라 ``사모님두요`` 요러드라구요.


낮설은 사람 그것도 아가씨가 주인장의 사생활 공간에 들어왔으니 경계(?)의 본능이 발동한 것이 당연하리라. 하지만 그 그림이 귀엽게 느껴지는것은 주인장의 마음이 예뻐서인가 봅니다.
암튼 이제 사무실이 마련되어 이사한다 하니 시원섭섭 하시려나?
축하하는 의미에서 새사무실에 꽃배달이라도 보내드리고 싶네요.
덧붙여 우리 마눌님 안보니까 한마디 `허신영님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허신영 2004-01-30 오전 10:09:56 삭제
불곰님의 글을 보고 저도 새해 인사를 드려야 하겠다는 욕구가 생겼지 뭡니까....^^

불곰님의 소감글 참 재밌게 읽었습니다. 늘 이렇게 들러주셔서 감사합니다.

우리집 비서아가씨는 여전하구요 ^^
아직까지도 세 사무실로 옮기지 못했습니다.
다음주라고 또 하는데 역시 무슨 contract 가 안되엇다고.....
이곳은 보험이 워낙 중요하다보니 별 오만가지에 해당하는 보험처리가 되어있는지를 확인하고 한 다음에 계약이 맺어지더군요.
나같은 성질급한 한국인은 정말 물 못 기다리고 우물을 하나 팔것 같습니다.

저는 간들간들한 목소리는 아니지만 여튼 불곰님도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요" ^^
김쌤 2004-01-31 오후 3:43:15 삭제
글 잘 읽었어요^^~ 어떤 감정일지... 저도 언능 결혼해서 사랑스런 질투감정을 느껴보고싶네요^^ 연애할때의 감정과는 또다른 무엇이 있을것 같아요. 잠시겠지만 자유를 박탈당했다고 생각치 마시고, 생활의 긴장감을 얻는다고 생각하세요^^ 그래야 같이 계시는 동안 맘이라도 편하죠.. 아마 복딱대던 사무실이 빈다면 잠시나마 서운하실거 같네요^^ "홧팅!"
ju 2004-02-01 오전 5:24:02 삭제
허신영씨의 글은 읽어 내려가면서 마음을 조마 조마하게하는 재주를 갖었어요
내 가슴이 다 콩당콩당하고 한번도 만나본적없는 한국 여인의 남편의 여비서에게 질투를 느끼게되다니....마치 내 여비서처럼요..
그래서 생각을 해보았지요
내 남편의 여비서가 그리 이쁜 젊은 미모의 아가씨라면...
오늘 아침 일찍 눈이 떠지자마자 어제 읽었던 이 글이 생각나서 아직도 자고있는 남편을 깨워서 당신 비서 바바라가 몇살이지?
갑작스런 질문에 기가막힌지 잠꼬대하는줄알고 이불을 잘 덮어주길래 또 다시 물었더니...놀래 기절초풍이예요
자다말고 왜이러는지,,어디 아픈지...아무튼 50살이 넘었다는군요
조금 안심(?)이되는 이유를 모르겠군요...
지난주 일요일에 같은 대학에 계시는 아주 나이 많으신 교수님(학장)댁에 저녁초대를 받아서 갔었어요. 그분 75세 생일이 지난 이틀후였구요
저녁식사중 영화이야기가 나와서 재미있게 봤었던 영화 talk to her 라는 스페인 영화이야기를 했는데 그분들도 보셨더라구요
그 부인도 그정도 나이이신데 .... 우리 남편도 그 영화 너무나 좋아하지 아무것도 안입은 나체를 카메라 앵글로 가까이 잡아서 감미로운 음악과함께 빙빙 돌아가면서 그리 자세히 그리 오래 보여주는데....너무나 좋아하지...에휴..남자는 역시 남자야 ..나이가 많으나 젊으나....하면서 질투를 하시던데요
그영화는 십대의 발레리나가 사고가나서 식물인간이되어 오랜시간을 시체처럼 누워있고 간호사가 사랑으로 다시 살리는..그런 영화
그 문제의 장면은 식물인간 상태에서 잘 씻기는 장면이었구요
암튼....그 교수 부인을 보면서 난처해하는 그 명망높은 교수님을 보면서 ...아...여자는 여자구나 했지요
나도 지금 이나이에 마음은 20대 그대로인데...저 나이가되어도 지금의 마음이 그대로 가겠구나했어요

에구..무슨 답글이 이리 엉뚱한데로 흘러갔을까요
다시 읽어보고 지울까하다가 그냥 내버려둡니다

배고픈 이 한국 아줌마는 김치찌게 끓이러 내려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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