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번호 58  등록일 : 2003-12-20 오후 11:53:43

친구에게
글 : 허신영 ()


보고싶은 친구에게!

너는, 땅에서 혹은 수면 위에서 뿜어 나오는 안개를 본 적이 있니?
하늘에서 푸르른 어둠이 내려와 대지에 스며들기 시작할 즈음,
온통 세상이 그 푸르스름의 색깔로, 조용히 그리고 적막히 물들어갈 즈음,
새들도 짝짓기 노래를 멈추고 모두 보금자리를 찾아갔을 즈음,
대지는 정적만 남긴 체, 땅과 나무가 수면을 취하기 시작할 즈음,
이럴 즈음, 땅이 내뱉는 짙은 한숨을 본적이 있니?
그 한숨 속에서 솟아나는 하얗고 짙은 안개 속에 반쯤 묻혀버린 나무들을 본적이 있니?

며칠전이야.
버스를 타고 여행을 하면서 창 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풍경을 내내 내다보고 있었어.
이곳 아일랜드는 한겨울인데도 그다지 춥지않은 날씨여서인지 땅에서 혹은 개울물 수면위에서 짙은 안개가 자욱히 피어오르는 모습을 종종 볼 수 있어.
그때마다 마치 '엑스칼리버' 나 '아더왕' 같은 중세의 갑옷입은 기사들을 다룬 영화의 한 장면을 연상케 하곤 해.
왠지 안개가 피어오르는 땅에는 신비로운 전설이 감춰져있을 듯도 하구말야.

친구야.
아주 오래간만에 네게 편지를 쓰는 것 같아.
하지만 그건 너를 그동안 잊고 있었다는 뜻은 결코 아니야.

잠은 잘 자고, 음식은 잘 먹고, 너무 일에 치어 힘들지는 않는지, 종종 휴식을 곁들이기도 하며 잘 지내고 있는지, 무엇보다도 마음의 평안을 찾았는지, 늘 생각하고 염려하고 그리고 기도한단다.

그동안 난 너에게 하고 싶은 얘기가 그렇게도 많았어.
네가 알까?
이 얘기도 해야지, 저 얘기도 해야지 모아놓고, 그렇게 높게 쌓아놓기도 했었어.
시간이 지나면 저 밑바닥에 깔린 얘기는 위에 짓눌려 으깨져버리고, 그렇게 균형을 잃고 어느 날 힘없이 무너져버리기도 하기를 여러차례 반복했었어.

너에게 할 얘기를 모을때면 난 웃기도 하고, 때론 뾰루퉁 입술을 삐죽 내밀기도 하고, 양미간을 찌푸리고 짐짓 심각하기도 하고, 간혹 화난표정을 짓기도 하지만, 그래도 미소지으며 얘기를 모을때가 가장 많았었어.
물론 내 얘기가 늘 그랬듯이 일생에 중요한 대사를 다룬 얘기도 아니고 그저 주절주절한 넋두리나 수다꺼리 이겠지만 말야.
어쩜 너와의 대화라기 보다는 나만의 독백을 하고 있었던 것이었기도 하구.

그래. 넌 그런 내 마음을 이해할 것이야.

너를 떠올리면서, 그렇게 이야기들을 모으면서, 난 항상 네가 곧 건강이 회복되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음도 넌 알고 있겠지?

친구야!
우린, 사랑이 무엇인지, 행복이 무엇인지, 삶이 무엇인지, 외로움이 무엇인지 그리고 어머니의 존재에 대해서 더 나아가 한국인들이라는 우리 민족에 대해서까지 끝도없는 질문들을 만들어냈었어.
그리고는 또 우리들만이 정답을 알고 있는 사람들처럼 혹은 철부지 16세 소녀들처럼 감히 방자하게 잘난척들을 하고 또 했었어. 아무것도 정답을 내릴수는 없었지만 그러면서도 넌 내가 알지 못하는 것들을, 또 다른 시각에서 볼 줄 아는 각도를 내게 알려주었어.
난 동감하기도 했고 때론 내가 옳다고 억지고집을 부리기도 했지만 그런 나를 넌 항상 재치있게 받아들여줬지.

내가 그동안 잊고 지냈던 '입 큰 개구리' 얘기도 들려주었고, 흰 도화지 위에 새까만 '김'을 그려 정신과의사로부터 정신불안으로 오해받았다던 국민학생 얘기며, 그 외에 재밌는 농담들로 내가 많이 깔깔거리고 웃을 수 있도록 웃음을 주기도 했었고 말야.

항상 외톨이 아이였던 내게, 꾸밈없는 순수함을 너와 함께 나눌 수 있었음은 분명 "행복"이라고 생각해.

무슨 얘길 하고싶어서 그렇게 서두가 긴거냐고, 요점정리만 요약해서 보고하라고 너의 그 하얗고 고른치아를 드러내고 웃고있는 거니?
몰라.
나도 네게 무슨 얘길 하려고 이렇게 글을 쓰고있는지....

아무래도 너무 할 얘기를 많이 쌓아두었다보니 어떤 것부터 말해야 할지 결국 아무 말도 못 꺼내고 있나봐.
얘길 쌓아두지 말고 그때그때 기록해뒀더라면 이런일이 없었을텐데.

사람들을 만나면 대화거리를 쥐어짜내야 할 정도로 말수가 적은 내가, 너도 알 듯이, 할 말 외에는 그다지 덧붙이기를 하지 못하는 내가, 너에게만큼은 할 얘기를 쌓아두고 있는걸 보면 넌 아무래도 내게 가장 가까운 친구임이 틀림없어.
..........

하루하루 인생을 살아가며 난 늘 배우고 있다는 생각을 해.

생각이 많으면 진실에서 멀어지고 오히려 거짓에 가까워지는 법.

그래서 너무 깊게 생각하지 않는 범위내에서, 떠오르는 느낌들을 감지해내고, 그런 진심 혹은 느낌들만 다루어서 생각하려고 해.

'배운다' 라는 것은 결국 '변화'를 말함이야.
'변화'를 싫어하는 사람들은 '배움'도 싫어하지.
그 배움이란 사실 곤경속에서 어려움속에서 더 잘 이루어지는 것 같기도 해.
이렇게 난 조금씩 조금씩 어른으로 변화되어가고 있는 것이었으면 좋겠는데 말야.
그러다 다시 어린애가 되어 발버둥치며 떼를 쓸때도 있지만 그 역시 배움의 과정이라고 생각하며 스스로를 위로하고 있어.

나는 매사에 감사해 할 줄 알아야 함을 배워.
너는 어떠니?
너도, 이 우주에, 이 세상에, 이웃에 늘 감사한 마음을 갖고 살고 있니?

내가 '순수의 유치'를 지니고 있다면, 넌 '무모한 친절'을 지니고 있는 사람이라 스스로를 칭하였었어.
네 자신에게 그렇게 말할 수 있는 너는 분명 친절한 사람이고, 겸손한 사람이며, 예의를 갖춘 사람이라고 난 확신해.
그래. 분명 넌 사람들에 대한 '무모한 친절 (예의)'를 갖추고 있는 사람이야.
더구나 너는 명예와 부를 갖추었고, 그래서 소위 사회적인 '성공'이라고 말할 수 있는 위치에 놓여있는 사람이며 그렇기에 너의 친절이나 예의는 뭇 사람들에게 더욱더 돋보이고 있다는 것도 잘 알고있어.
넌 이런 얘기들을 무척이나 부담스러워하고 있다는 것을 잘 알지만 오늘 네게 하고 싶은 얘기가 있어서 그러니 참고 조금만 들어줘.

내가 좋아하는 친구야!
언젠가 넌 내게 이런말을 했었지. 이상하게도 넌 '존경'하는 사람이 없다고.
고등학교 앙케이트 지에 [존경하는 사람은?] 이라는 빈칸에 곧잘 세종대왕이나 링컨 혹은 아버지 같은 인물들을 써넣곤 하는 친구들이 있었는데, 넌 그 때에도 존경하는 사람이 없었을까 하는 생각을 해봐.

인생을 살면서 꼭 존경하는 사람이 있어야하는 것은 아니지만, 네가 말하는 뜻은 존경할만한 사람에 대해 그만큼 잘 알지 못한다는 뜻도 될 수있고, 혹은 그의 업적은 존경할만하나, 사람을 존경할만하지는 않다고 생각하는지 모르겠어. 또 다른 이유가 있는지도.
대신 넌 "존중" 이라는 단어를 사용했지.

친구야!
그럼 넌 주위 사람들을 모두 '존중'하고 있니?
넌 어쩜 "몰라. 그런 것 물어보지 마" 라고 말할지도 몰라.
젊은 나이에, 너무 높이 올라 서 버린 너는, 그동안 수많은 것을 듣고, 보고, 경험하여 배웠지만 높게 올라 선 너와 함께 수평선에 설 만한 사람은 그리 주위에 흔하지는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 설령 있다고 해도 너와함께, 순수한 유치와 무모한 친절을 나눌만한 사람을 만나기도 힘들었을테고.
그것이 네게는 부인하지 못할 현실이며, 현실을 긍정하여도 부정하여도 너 스스로를 괴롭히고 있다는 것도 알 것 같아.

친구야!
나에게는 답이 없어.
네가 다시 생기를 찾고 고통과 아픔에서 풀려날 수 있는 그런답을 난 가지고 있지 못함이 나에게는 또한 아픔이야.

나의 좋은 친구야!
하지만 내가 근간에 내 머릿속에 떠올려진 내 느낌들을 몇가지만 얘기해보려고 해.

네가 아주 '특별한사람' 이듯이 모든 사람들은 '특별한사람' 들이야.
개인마다, 정해진 또는 한계의 보폭이 있다는걸 넌 나보다 더 잘 알고있지?
우린 그들의 '한계'를 존중해야 해.
아무리 하찮은 알콜/마약 중독자/노름꾼/매춘부라고 할지라도, 또는 학력과 권력과 부로서 사람의 가치와 순위를 정하는 청와대 주변의 군상들이라 할지라도 우린 그들 모두를 존중해야해. 그들 눈높이에 나를 맞출 필요는 없다고 해도 우린 존중해야 해.
일부, 박사, 대학교수, 정치인이라는 간판의 그들이 우리눈에 너무나 한심하게 보일때가 많을지라도 우린 그들 모두를 존중해야 해.

언젠가 내가 너에게 불평했던, 후진하다 남의 차를 들이받아 놓고도 목청 돋구어 자기탓이 아니라고 말하는 막무가내 사람도, 남 생각은 눈꼽만큼도 없고 오직 자기자식밖에 모르는 이기적인 그런 사람도 우린 모두 다 존중해야 해.
그건 예의를 갖추어 대한다는 뜻하고는 조금 달라.
너는 예의를 갖추어 사람들을 대하지만 넌 존중하지는 않아.

왜 그럼 우린 이런 군상(?) 들을 존중해야 하는걸까!
우리가 그들을 존중하지 않으면 결국 나도 내 자신에게 존중받을 수 없고 아무것도 배울 수 없기 때문이야.
결국 나 자신의 진보도 없고 또 스스로를 사랑할 수 없다는 얘기이지.
나는 내 스스로가 남들보다 더 잘났기에 더 높은위치에 있기에 스스로를 사랑하는 것은 아니듯이.
사랑받을 만한 사람이어서 스스로를 사랑할 수 있다면, 우린 평생 사랑할 만한 때를 결국 맞이하지 못하겠기에.
..........

우린 모두 수평선 위에 있어.
네가 말하는 조직과 자본주의에서는 수직선과 수평선이 동시에 존재하겠지만 우리 사람들만큼은 수평선에 존재하는거야.
각자 다른일을 다른방식으로 다르게 행동하지만, 그것은 각자의 보폭일 뿐, 누가 더 높게 올라서 있는 것이 아니야. 그냥 우린 모두 다 특별한 사람들 일 뿐이야.

난 네가 조금 더 사람들을 존중했으면 좋겠어.
행여 너를 아는 사람들은 내가 한참 오해를 하고있다고 생각할거야.
너는, 너의 그 직책을 이용해 한번도 남용해 본적이 없듯, 권위의식을 혐오하는 사람인 것을 남들은 아주 잘 알고있을테니까....

사랑하는 친구야!
우리 모두가 다 특별하기에 너만 특별한 것이 아니듯이 그 [특별함] 이라는 환상에서 벗어났으면 좋겠어.
너 스스로를 판단하고 찢어내는 아픈 생각들은 오직 생각들일뿐이며, 그 생각속에 의미를 부여하지 말것이며, 그리고 그 생각들을 미워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생각은 생각일 뿐이니까.

너는 너 스스로를 판단하고 평가하고 정죄하지만 그 판단에 이르기까지 넌 주위사람들이 너를 무엇이라고 말하고있는지와 넌 스스로에게 무엇이라고 말하고 있는지 비교하고 있어.

너는 너의 보폭으로 길을 걷되 모두 다 너만큼의 보폭으로 걷는 것이 아니니 좀 더 이해하고 좀 더 존중할 수 있는 순수한 겸손을 갖추었으면 좋겠어.

너무 깊은 생각에 빠져 혼돈속에 휘말려들지 말고 그냥 떠오르는 느낌들만 간직할 수 있었으면 좋겠어.

너는 남을 행복하게 해 줄 수 있는 위치에 있다는 생각도 좋지만 그렇기에 너 스스로는 행복할 수 없을거라는 오만함도 없었으면 좋겠어.
감히 이런말을 하고있는 나에게 "어쭈구리" 라는 따위의 단어가 행여 생각난다면 그런 자만심도 한번 정리해줬으면 좋겠어.
우린 모두 다 수평선상에 있기때문이야.

나의 친구야!
네가 이미 다 알고있는 이야기들일테고 어쩜 수없이 자신에게 되뇌였던 것들일수도 있어.
네가 그랬듯이, 어쩜 난 이런이야기들을 스스로에게 하고있는 것인지도 몰라.

네가 겪는 아픔은 좀 색다른 아픔이라고 생각되지만 또한 알고보면 우린 모두 다 색다른 아픔을 겪고 살고있지.
너의 아픔은 배움이고 곧 성장할 수 있는 "변화"를 가져다줄 수 있는 기회가 되기를 진심으로 바라고 있어.

마음이 아파 결국 몸까지 아파하고 있는 친구에게 내가 도움이 될 수 있는 말을 할 수 있다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어.
그래서 위에 한 말들은 그냥 횡설수설 넋두리를 한 것임을 이해해 주라.
오히려 네게는 짐을 더 얹혀준 결과가 된 것은 아닐까도 염려스러워.
내 말을 듣고 네가 변화하기를 바라는 것도 천부당만부당한 얘기이고, 그냥 네게 얘기를 하고 싶었던 것일 뿐이었고 한번쯤 이런부분들도 생각해보자는 것이었어.

"좋은사람" "멋진사람" "잘난사람" "난사람" "된사람" 또는 "나쁜사람" 네가 어떤 카테고리에 들어있다고 사람들은 말하는지, 혹은 스스로를 어떤 사람이라고 생각하는지의 함정에 빠지지 않도록 하자. 우린 위의 카테고리 속에 속해야 할 의미나 필요가 전혀 없어.
다만 스스로가 "행복한 사람"이면 되는 것이니까.

하여간에 내 순수한 의도는, 늘 너의 몸과 마음이 건강하기를 하는 간절한 마음이라는 것을 네가 알아주기를 바래.

친구야.
매년 연말이되면 난 내가 몇 년도에 살고있는지 헛갈려할때가 많아.
그래서 지금도 2003년인지 2004년인지 좀 생각해봐야 할때가 많아.
그래. 벌써 또 그렇게 한해가 지나가고 있어.
난 새해를 앞두고 마무리같은 것을 한번도 해 본적이 없는데 이 기회를 이용해 생각해볼까 해.
새해에는
건강한 정신에서 건강한 몸이 나오듯이 (vise versa) 우리 모두 건강해졌으면 하는 간절한 바램이야.

내가 좋아하는 친구가 있다는 것에 행복해하며

2003년 12월에.......

안녕~~


(총 : 150 건)
kimssam 2003-12-22 오후 1:43:53 삭제
친구...
바쁜 일상을 탓하여 소중했던 나의 친구들을 돌아볼 시간이 없었던듯 합니다.
이젠 애기 엄마가 된 친구... 그리고 자신의 일에 전문가가 되어 자랑스럽게 일하는 친구... 그리고 아직도 백마탄왕자를 마냥 기다리는 친구... 그 시절엔 둘도 없었던 소중한 이들... 그리고 나
저도 친구들에게 편지한통 띄워야겠습니다.
그리고 새해를 맞아 서른한해를 정리하며 저에게도 편지를 한통 써야겠습니다. 할말이 참 많을거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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