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번호 57  등록일 : 2003-11-20 오후 10:48:09

멋쟁이 신사는 유행을 싫어할지도 몰라
글 : 허신영 ()

어떤 사람들은 내가 누구하고든 부끄럼없이 그리고 서스럼없이 말을 잘하고 쉽게 친분관계를 맺을줄로 생각한다.
나는, 내 나이에 내 신분 (아줌마) 에 어울리지 않게, 실은 상당히 부끄러움을 많이 타는 사람이다.
특히 첨보는 사람들에게는 낯을 무척 가리는 편이다. 용케도 상대는 전혀 눈치채지 못하는것 같지만 난 얼마나 부담스럽고 쑥스럽게 곤혹을 치르는지 모른다.
어지간히 각별한 사이가 아니고서는 난 그다지 말을 많이 하지 못한다.
그런 이유로 난 또한 "재미없는 사람"으로 알려져 있기도 하다.

오늘, 데이빗 비지니스 손님이 영국에서 데이빗을 만나러 출장을 나왔다.
데이빗이 워터포드공항에 마중을 나가고, 우리집에는 절대로 데리고 오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했건만 저녁식사전 한게임의 골프를 해야겠다고 골프꾸러미를 가지러 들러야겠단다.
잠깐 들르겠다는 전화를 받고, 왜 하필 워터포드 공항과 우리집까지는 5분 거리밖에 안될까! 를 투덜거린다.
고양이 세수를 하고 사는 나는, 거기에 걸맞는 (내가봐도 촌스러운) 시어머니가 입지 못하여 내게 대물림을 준, 어느 시대의 유행인지 짐작하기 어려운 우중충한 치마차림을 하고 있던 날이다.
손님이 들른다고 갑자기 옷을 갈아입거나 얼굴에 단장을 하고싶지는 않다.
애들한테 잽싸게 거실에 어질어진 장난감들이나 치우라고 호령겸 명령하고.....

잠시 후 영국신사가 우리집 거실안에 들어왔다.
본업이 의사란다.
데이빗은 나와 그를 번갈아가며 이름 소개만 시킨 뒤, 내게 손님을 맡기고 서둘러 나가버린다.
창고속에 처박아 둔 먼지 낀 골프채를 준비하느라 분주한 틈에, 여주인인 나는 우리집에 들린 이 영국신사를 잠깐동안이나마 인사말 접대를 해야할 판이다.
피할 수 없다.

말주변이 없는 나는 정말 이런 상황이 곤혹스럽다못해 죽을 맛이다.
상대가 점잖은 신사여서 말이 없는 사람이라면 그 곤혹은 2배 3배로 증가한다.
내가 그 침묵시간까지를 감당해야 하기 때문이다.
난 사실 이 신사가 영국인인지 몰랐었는데 인사말이 오가며 영국식발음으로 영국인이란 걸 눈치로 알아차린 정도였다.
40대 중반의 이 금발의 영국신사는, 큰 키에, 명암이 깊은 녹색 테일러 바지를 입고, 그 바지색상에 맞춰입은 셔츠와 모직스웨터를 잘 매치시켜 세련된 신사의 멋이 풍기고 있었다.
더구나 그의 영국식 영어억양은 그의 신사다움을 한층 더 돋보이게까지 했다.

"차라도 한잔 하시겠어요?" 만만한 게 차한잔이다.
"아니요 방금 마시고 왔어요"
"그럼 저 소파에 좀 앉으시지요"
"하루종일 앉아있어서 좀 서 있는게 편해요"
차라도 마시겠다면 차를 끓이러 이 자리를 잠깐이라도 떠나 시간이라도 좀 벌 수 있을 것 아닌가!
앉아있겠다면 서서 얼굴을 맞대고 있는것보다는 덜 쑥쓰러울것이 아닌가!

"오늘 비가 하루종일 내렸는데 골프치기에는 너무 질퍽거리지 않을까요?"
정말 하루종일 비가 왔다 오후에서야 좀 게이고 있던 참이었다
"상관없어요. 별로 게의치 않거든요"
"젖은땅에서 치는게 많이 익숙해지셨나보군요"
"뭐 그런건 아닌데... 괜찮아요"
난 또 뭔 말로 이 시간을 때워야 하나 머릿속에서는 다음 문장을 작성하느라 분주하다.
"골프는 자주 치시나요?"
"시간이 없어서 일년에 반 다스(half a dozen) 정도 쳐요"
대여섯번이라고 하면 될 것을 이 양반은 반 다스라고 표현을 하는구나.... 1다스가 12이니 반절이면 6을 말하는구나 하고 혼자 나름대로 계산하고 있다.

"영국 어디에서 사세요" 할말이 정말 궁하다.
"밀튼 말배에서 살아요. 전엔 런던에서 오랫동안 살았지만 이사를 했어요."
-밀튼이 어딘지, 말배가 어딘지, 혹시 영국 어느지역에는 소배라는 곳도 있을지!-
"전원지역인가요?"
"네, 내 아내가 정원가꾸기를 좋아해서 전원지역으로 옮겼지요. 아들은 런던의 좋은 학교를 다니고 있어서 전학하지 않고 주말에 집에 오구요"
"자녀들이 몇인가요?"
"아들 하나예요. 14살이죠. 의붓딸이 하나 있는데 그 딸은 28살이지만 정신연령은 14살이랍니다. 둘은 만나면 늘 싸우죠"
첨보는 사람에게도 의붓딸이 한명 있다고 말하는 것은 내가 친해서가 아니라 이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는 것을 여러차례 보았다.
-의붓딸과 친아들이 싸운다면 그야 당연히(!?!) 친아들 편 아니겠는가! 오직 하나뿐인 사랑스런 어린 아들과 싸우는 의붓딸이 얼마나 얄미울까! 저 커다란 것이 어린동생과 싸운다고 생각하여 정신연령이 낮은 사람으로 보일만도 하겠구나. 저 부인은 어찌 생각할까!-를 난 순간적으로 생각하고 있다. 의붓딸의 철없음을 얘기하는 이 신사에게 난 무슨말로 다음문장을 구성해야 하남.

-이 데이빗은 아직까지도 골프채 준비가 안되었나? 빨랑 좀 이 영국신사를 데리고 나가줘야 내가 이 부끄럽고 쑥스럽고 어색한 순간들을 모면할 수 있으련만....-
하여간 이 영국신사는 내가 알고있는 아이리쉬들처럼 유머감각하고는 거리가 멀었고, 오히려 심각하게, 그리고 내가 힘들게 궁색하게 작성해낸 문장에만 딱딱 대답을 하고 있으니, 그야말로 비협조적이며 도움이 안 된단 말이다.

-어쩜 이 영국신사는 내가 입은, 시대를 알 수 없는 내 치마차림에 기가 차서 말하기가 싫은지도 몰라! 그럴 줄 알았으면 옷을 갈아입을걸 그랬나!-

난 아무래도 내가 입고잇는 대물림치마가 마음에 걸렸다.

"부모님들은 자식이 몇 살이든 항상 어리게만 느껴지지요. 댁의 아버지는 댁을 몇 살로 생각하고 계신가요?" 라고 물었더니 이 양반은 대답을 선뜻 못하고 쭈빗거리며 옹색해 한다.
이거야 원! 분위기를 좀 바꿔본다고 한 가벼운 농담이었는데 이 신사는 나보다 더 말주변이 궁한 사람인가 보다.
아니다. 내 실수다. 이 신사는 의붓딸의 철없음을 얘기한 것이거늘 난 친 자식이라는 개념에서 일반화시켜 말해버린 꼴이니..... 난 이런 실수를 본의 아니게 저지르는 바람에 말하기를 꺼려한다는 걸! 난 나를 쥐어박으며....

"그냥 농담이었어요" 라고 얼릉 덧붙였다.
-음음~~~~ 또 할 말이 뭐가 있남~~~-

"루튼에서 비행기를 탔다고 했죠? 영국 루튼에서 워터포드까지 얼마나 걸리나요?"
그는 한참을 생각한뒤에 "1시간 반정도 걸렸어요" 라고 정직하게 대답한다.
-그렇게까지 한참을 생각해서 정확한 대답을 내놓지 않아도 되는데.... 그냥 뭐라도 물어볼 말을 작성해본 것 일 뿐인데-
"그렇게나 오래 걸리나요? 런던에서 더블린까지는 45분정도 걸리는데 위치상 더 걸리나보군요" 내가 가본 영국은 런던 히드로와 만체스터와 리버풀 뿐이지만.
-데이빗은 아직도 안 끝났나- 속으로 궁시렁대던 차에 마침 다 준비되었다며 거실에 들어온다. 이내 막 안도의 한숨을 쉬려던 차에 난데없이 주미가 갑자기 나서서는 "아빠. 골프신발도 가져가야지!"
-아이고- 골프신발을 찾으러 가면, 또 나가서 몇분을 더 지체하게 된다는 뜻이다.
"응. 그래. 깜빡잊었네"
그렇게 데이빗은 골프신발을 찾으러 다시 나가버렸다.
이제 골프신발 찾는동안 난 뭔 말을 더 해야하나......빨리 찾아야 할텐데....

손님을 거실에 세워두고 자리를 떠날 수 는 없는 일.
나도 덩달아 허둥대는 척을 좀 한 후에
"저녁식사를 시작하기전까지 18홀을 다 마칠수 있을까요?"
"9홀만 하기로 했어요"
"던모어 골프장은 바다를 앞에두고 있어 경관이 대단히 아름다워요. 좋아하실 거예요"
"네"
드디어 데이빗은 흙과 잔디가 잔뜩묻은 골프신발을 가져와 씻으러 간다고 싱크대를 향한다.

망건쓰다 장 파 한다더니 바로 이런때를 두고 하는말인가 보다. 장에 가려고 망건을 이래저래 머리에 써 보느라 너무 지체해 그 사이에 장이 다 끝나버린다는 뜻이렸다.
그가 싱크대에서 신발을 씻는 동안 난 이대로 여전히 자리를 지키고 있어야 한다.
고맙게도 영국신사가 이번에는 협조적이었다.
"어차피 젖은잔디밭에 들어가면 다시 더러워질테니 그냥 가져가지요"
와 다행이다!
씻으러 갈동안 또 얘깃거리를 찾아야 했다면 정말 죽음이었을텐데.

잘 가시라고 재밌게 골프 치시라고 기쁜 마음으로 인사를 정중히 하고, 홀가분하게 얼릉 부엌으로 들어왔다.
잠깐 후, 주미가 쪼르륵 달려와서는 아빠가 날 부른단다.
-아니 아직 안가고 날 또 부른단 말야?-
현관에 나갔더니 차에 탄 두 사람이, 앉은 체 나를 보고 데이빗이 먼저 말했다.

"신영~ 저...."
그러자 영국신사가 옆에서 말을 받는다.
"저녁식사에 초대하고 싶으니 함께 가지 않을래요?"
"꿀꺽~" 침 넘어 가는 소리다. 군침이 돌아서가 아니라 아이고머니 맙소사~~~
"네, 정말 감사합니다. 전 집에 남아있겠어요. 애들도 봐야하고 그냥 집에 있겠어요"
너무나 뜻밖이었다. 10 여분 동안도 내겐 고문이었는데....
"애들도 함께 데리고 나오세요."
"엉???"
아니 이 영국신사... 하튼 너무 고마웠다. 저 신사가 나를 저녁에 초대하고 싶다니, 난 집에서 애들봐야 한다고 사양했건만, 애들도 데리고 나오라니 감개무량이다.
"정말로 친절한 제의 감사드리지만 그냥 집에 있겠어요"
아무리 감개무량이라고 해도 함께 마주보고 먹는 식사에 맛이 있을 것 같지 않다.
"아니예요. 괜찮으니 함께 식사하지요"
그는 여러차례 권유를 하고 실망한 표정까지 아낌없이 지어보였다.
"내가 마음이 변하면 좀있다 전화를 드리지요. 정말 감사합니다"
나보다 더 말주변이 궁색한 사람같더니만 물러서지 않고 함께 가자고 졸라대다니, 마음이 변하면 전화하겠다는 말로서야 거절이 먹혀들어간 셈이다.
이거야 원! 사양하기가 무례할정도로 이 멋쟁이 영국신사는 아쉬움에 실망한 표정을 내내 지어보였다.
-휴~ 아이고 한숨이야-

생각할수록 기분이 "가이" 없이 괜찮다.
부끄럽고 쑥스럽고 옹색해하는, 더구나 시대를 짐작하기 어려운 치마를 입고사는, 밋밋하고 재미없는 아줌마 나를 저녁식사에 초대를 하고 싶어하였고 거절하자 실망까지 하였다니.

밤늦게 돌아온 데이빗에게 난 재잘거린다.
"그 친구가 날 초대하다니 놀라웠어...
기분 좋았다구....
내가 안가겠다니까 그 신사 실망하는 표정 봤지? 그가 내 얘기 더 하던가? 아무래도 그냥 따라나갈걸 그랬나봐...
애들까지 데리고 갈 수는 없었지만 말야...
다음에 또 그 잘생긴 신사가 오거든, 그래서 날 또 초대하거든 이번에는 당신이 애들보고 있어. 나 혼자 나갔다 올테니까........"

"그래. 그 신사가 지금 당장 다시와서 당신을 초대 할 것 같지는 않으니, 그건 나중에 염려해도 될 것 같군. 우선은 잠이나 자라고..."

"쳇~"

그리고 돌아누워 난 혼잣말을 해 본다.

-아무래도, 그 시대를 짐작할 수 없는 치마가 맘에 들었는지도 몰라. 어쩜, 우리 시어머니 시대의 사람일 그의 어머니도 나와 비슷한 치마를 입고 있는지도 모르지, 멋쟁이 신사는 유행을 싫어할지도 몰라-


(총 : 339 건)
kimssam 2003-11-21 오전 11:55:27 삭제
마치 제가 지금 그자리에 있는것처럼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오릅니다.
글읽는 내내 킥킥거리며 어찌 이리도 그때의 그 상황과 똑같을까라는 생각을 하게됩니다.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그 처음순간은 누구에게나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불편하고, 부담스럽겠죠.
하지만 똑같이 어색한 상황에 놓여있었던 영국신사(말주변없는 걸로는 저와 별반 다르지않은 이)에게는 다정하고 편안한 대화(아줌마표 대화)로 이끌어준 허신영님이 또다시 만나보고 싶은 사람으로 기억되지 않을까요? 그리고 그 대물림치마도 허신영님말처럼 한몫 했겠네요, 그거 저도 한번 보고싶어요^^.
juyean 2003-11-23 오후 4:09:43 삭제
그 영국신사가 꼭 내 남편같은 착각속에서 글을 읽었습니다
농담을 잘 못 알아듣고 심각하게 생각하는 내 남편도 영국신사거든요
바쁘다더니 언제 아일랜드까지 갔지?하는 생각들정도로 비슷한 모습이군요....나이와 키와 입은 옷까지....
저녁초대에 가시지 그러셨어요
내 남편같은 그분의 실망하는 눈빛에 나도 실망이되던데....
그리고 나도 그치마 보고싶어요
(190정도인 남편네 식구들... 160정도인 제게 시어머니가 치마 물려주면 어쩌지요? 치마 앞자락 밟아서 넘어지겠지요..)

아주 재미있게 잘읽었어요
불곰 2003-11-23 오후 6:57:24 삭제
조그만 회사를 운영 하면서 연례행사로 `고사` 를 지냅니다. 서양의 `thanks giving day`처럼. `망건`을 알고 계시니 `고사`를 물론 알고 계시리라...
어제는 `고사`를 지내느라 formal하게 검은양복에 넥타이를 했고, 오늘 고종조카의 결혼식에 다녀오느라 어제의 의상을 그대로 이어갔구요.
이번에 올린 유행에대한 영국 신사에 관한글은 사뭇 흥미롭네요.
왜냐면 이 칼럼의 주인장은 낮설움이나 초면의 어색함에 대하여 매우 자연스런 대응법을 알고 계시리라는 선입견을 가졌었거든요.
그런대도 이 글이 자꾸 재미있어 지는건 주인장이 낮설어한 장면이 너무나 real하게 다가와요. 마치 우리 어머니가 몸빼바지를 입고 동네 부녀회장 출마를 햇던 내 어릴적 기억처럼.
다음번에는 데이빗과 아이들끼리 식사하게 놔두고 solo로 저녁식사 초대에 응하세요. 우아한 메뉴로.
그러고 보니 의문이 생기네요. 유행이 지났다는 표현.
out of date 인가,
old fashion 인가? 아님 다른표현이 있는지..........
앞에 올려주신 분의 글 처럼 그 치마는 한번 보구싶네요.
한번 그 사진을 올려주심이 어떨지.


미희 2003-11-30 오전 2:42:26 삭제
ㅋㅋ.. 언니의 당혹스런 표정이 상상됩니다. 하지만, 언니는 어떤 옷을 입으셔도 이쁘시고,워낙 재치있게 말씀을 잘 하셔서 그 분이 초대하신것 같은데요.. 다시 던모어의 그 골프장에 가고 싶네요.. 보고싶어요. 언니.. 주미도 조슈아도 데이빗도.. 다들 데이빗사진보고 이 잘생긴 분 누구냐고 물어보신던데요..^^
이병규 2005-07-31 오후 1:00:29 삭제
지수에게
안녕
잘보내니
마음이아퍼
그리고너선물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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