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번호 29  등록일 : 2001-09-20 오후 5:33:24

흐르지 않는 시계
글 : 허신영 ()

뿔테 돋보기 안경을 낀 백발의 그 할아버지의 모습은 꼭 하얀 부엉이를 연상케 한다.
윌리 할아버지가 한 시골 외진 곳에서 고향(아일랜드)의 역사를 몸소 겪은 산 증인이라고 한다면 부엉이 할아버지는 세계의 역사를 몸소 체험해온 산 증인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비바람과 먹구름이 많고 땅은 질퍽거려 유독 체감온도가 춥게 느껴지는 이곳 아일랜드의 한겨울, 죤은 맨발에 여름샌들을 신고있었다.
보통사람이라면 당연히 두터운 양말에 복닥한 신발을 신고도 춥다고 투덜거려야 할 날에, 죤은 그렇게 여름샌들 하나를 맨발에 걸고 있었다.

나는, 늘 허름한 차림의 그가 너무 가난하여 양말이나 신발을 살 형편이 못된다고 생각하여 양말 몇 켤레를 선물하였다.
그는 그 선물을 받고 내게 말했다.
"내가 양말을 신지 않는 이유는 이 양말 두 짝 중에 어떤 것이 오른쪽이고 왼쪽인지 도무지 알 수 없기 때문이란 말야"
나는 한참을 웃었다. 손에 끼는 장갑은 오른손 왼손이 분명히 구별되어야 하지만, 그러고 보니, 양말은 오른발 왼발의 구분이 없었고 또 그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여왔고 문제를 삼을만하지도 않다고 생각했었는데, 그것을 구분하기 어려워 양말 신기를 포기했다는 말은 내 생전 처음 들어보는 궤변이었으며 또한 재치 있는 핑계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에게 양말선물을 한 사람은 아마도 내가 처음이자 마지막이 아니었을까 싶다.

데이빗(나의 남편) 친구중에 키가 2미터 20이 넘는 친구가 있다. 너무 커서 걸을 때마다 긴 작대기가 휘청거리듯 온몸이 휘청거리는 남자.
죤은 그 친구에게 아주 적당한 직업이 있다고 우리에게 말해줬다..
동물원에서 "기린 이빨 닦아주는 일"이 가장 적격이라고....

누구든 죤 앞에서 머리가 지끈거린다거나 이가 아프다거나 이런저런 앓이를 늘어놓는다면 그는 꼭 처방 한가지를 내놓는다.
"머리가 아플 때 그 아픔을 완전히 잊을 수 있는 방법이 하나있지. 잘 들어보게.
커다란 벽돌을 들고 똑바로 선 자세에서 그 벽돌을 발 위에 떨어뜨리는 거야! 그럼 머리 아픈 게 순식간에 싹 가신다구. 한번 해봐"
정말 벽돌맞은 발은 뼈가 부서져 머리 아픈 것보다 훨씬 더 아플 테니 두통쯤이야 싹 가실게 맞는 말일 것이기도 하다. 벽돌보다는 그의 장난기 많은 궤변이 잠시 두통을 잃게 하는 것은 사실이었다.

부엌에서 윙윙거리는 쇠파리를 잡으려 여기저기 파리채를 휘두르는 나를 향해 소리를 버럭 지르는 사람이 또 죤이다.
"어어이! 잠깐 잠깐. 저 파리의 엄마 아빠는 물론 할머니 할아버지 삼촌 고모까지 모두 기다리고 있을 텐데 죽여서야 되겠는가 말야. 문을 열어 내보내 게. 그 파리 가족에게 돌아가게 내버려두라구." 라고 하면서 정말 창문을 열어 파리를 내어쫓는다.

죤은 또 롤리팝맨(Lolly Pop man. 작은 막대기가 꽂힌 사탕) 이란 별명으로 동네에서 잘 알려진 할아버지이기도 했다. 그는 아이들을 무척이나 좋아하는 사람이었으므로 식료품가게에 들를 때마다 한 무더기 롤리팝을 사오곤 했다. 그리고 그의 작고 낡은 파란색 차 속에 쟁여놓아 길에서 만나는 아이들마다에게 롤리팝을 주었다. 이젠 삼척동자라면 모두 죤을 알았고, 그 말뜻은 그 파란색의 낡은 차 속에는 언제나 롤리팝이 있다는 사실을 안다는 것이었다.
죤이 동네를 지날때면 기저귀를 찬 아이들서부터 10살이 족히 넘는 아이들까지 죤 주위를 둘러싸고 롤리팝을 외친다.
죤은 그 아이들에게 롤리팝을 일일이 건네준다.
어떤 아이는 엄마도 롤리팝을 좋아하고 동생도 있으니 더 달라고 당당히 요청하기도 한다. 그가 처음 아이들에게 롤리팝을 주기 시작한 그 때의 아이들은 이제 성인이 되어 아버지와 어머니가 되었고 그들의 자식들 또한 여전히 죤으로부터 롤리팝을 받고있기도 하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치과의사인 아버지를 둔 어린 남매는 한번도 롤리팝의 달콤함을 맛보지 못한 가엾은(?) 아이들이었다. 죤은 그들 남매에게도 예외일수는 없었고 그러기에 그들 남매에게는 그는 산타클로스 같은 존재였었다. 혀끝에 달라붙는 달콤함을 맛보게 해주는 유일한 사람 죤은 치과의사인 그들 아버지의 항의를 들어야 했다.
"제발 내 아이들에게 이빨 썩는 요인인 이런 사탕을 주지 말아주세요"
죤은 이렇게 대답한다.
"나와 아이들 사이에 롤리팝을 주고받는 건 나와 아이들과의 일이요. 나와 아이들과의 문제에 당신이 어째 상관한단 말이요?"
머쓱해진 치과의사는 할말을 잊는다.

죤의 직업은 TV나 라디오, 기타 가전제품을 수리하는 수리공이었다.
그의 파란만장했던 젊은 시절까지 거슬러 올라간다면 그는 제2차 세계대전에서 한몫을 한 사람이기도 했다.

그는 1945년 즈음에 인도 영국군대 본부에서 전시를 맞았다고 한다. 여기서 잠깐 그때 당시 정치적 상황을 간단히 엿본다면 인도는 영국의 식민지로 있을 당시였고 인도는 영국으로부터 1948년 해방되었다. 일본군들은 주변국가 미얀마 태국 필리핀 중국을 침략했으며 그때 당시 죤은 인도에 본부를 둔 영국군대에 가담하여 거기서 무전을 담당하는 라디오 통신병으로 활약했다고 한다.
그가 띤 임무는 상당히 중요한 것이었으므로 최전방에서 항상 멀리 떨어진 안전지대에서 일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었다.

아무리 안전지대라지만 그야말로 파리새끼 한 마리도 죽이지 않는 그가 어떻게 전쟁에서 싸울 수 있었느냐고 나는 발동한 호기심을 감추지 못하고 성급하게 물었었다.

"싸우긴 누가 싸웠다는 거야! 일본군들은 나의 좋은 친구였는걸! 전쟁포로가 된 일본군들 감옥에 몰래 들어가거나 풀어주고 함께 포커를 했었지. 아주 재미있고 착한 사람들이라고."
죤과 이야기 할 때면 항상 마지막에 뒤통수를 얻어맞는 듯한 느낌이 들곤 했는데 바로 이런 경우였다.

앞이 안보일정도의 모기떼들과, 담배를 입에물면 땀에 젖어 피울수없을정도의 살인적인 인도의 여름을 그가 어떻게 견디어 냈는지, 아니, 견뎌냈다는 표현보다는 살아남았다는 표현이 더 옳을지 모르겠다.

여름에도 서늘한 이 아일랜드에서 태어나고 자란 사람에게, 모기가 어떻게 생겼는지 듣지도 보지도 못한 사람에게, 인도의 여름은 그에게 있어서는 적과의 전시중이 아니라 여름과의 전시였을 것이다.

"밤이면 모기떼가 너무 많아서 앞이 보이질 않았고 그 모기떼들에 물리느라 잠을 잘 수가 없었어. 우리중 한 친구가 천장 석가래에 모기의 천적인 도마뱀 몇 마리를 올려놓았지. 정말이지 신나게 잡아먹더군. 얼마간은 살 것 같았으니까. 그런데 난데없이 나타난 뱀이 도마뱀들을 모두 잡아먹어 버리지 않겠나."

그가 그렇게 인도의 여름을 지내며 밤이면 가끔씩 지프를 타고 마을을 다녀오곤 했었다고 한다. 군부대 입출구에는, 전쟁물자를 밖으로 빼돌리지나 않는지 지프 안을 철저히 검사하는 경비를 통과해야 했다고 하는데 죤과 그의 일당들은 아무런 물자도 가지고 나오지 않고도 위스키나 럼주를 사 마시고 왔다고 했다.
위스키와 바꿀 수 있을만한 현금가치가 있는 물자는 바로 지프차의 스페어타이어였다고 하는데 군 경비대는 그들이 무엇을 갖고 나가서 물물교환을 하고 술에 취해 돌아오는지 도무지 알아채지 못했다고 한다.

죤은 전쟁에서 돌아와 동네 처녀와 결혼했지만 그의 결혼은 그다지 기대할만한 것은 아니었던 것 같다.
아내 베티는 인정 많은 사람이었으나 성격이 까다로워 함께 생활하기에 무척 어려운 사람이기도 했다한다.

베티는 결국 알코올중독이 되었고 끝내 약물과다 복용으로 삶을 마쳤다고 들었다. 둘은 함께 살면서도 수년간 부부로서의 마땅한 대화도 하지 않고 남처럼 살았다고 한다.

그들 사이에는 3남 1여의 자식이 있고 난 뒤였다.

죤의 세 아들은 모두 어부로 성장하였다.

3남 1여 중 둘째아들 이름은 죤의 이름을 그대로 따서 죤 이라고 불렀다.
아들 죤은 데이빗과 친한 친구였으며 미세스 오그레이디의 아들 죤 오그레이디와 데이빗 이렇게 셋은 그들이 철부지였을 때부터 개구쟁이 노릇을 하며 함께 자랐다고 한다.

아일랜드는, 바다와 육지가 이어지는 곳은 대부분 절벽(cliff)으로 되어있다.
이곳 워터포드 던모어(Dunmore) 역시 기암절벽을 기점으로 바다와 맞부딪쳐있는데 이 절벽들은 대단한 경관을 이루어내고 있기도 하지만 또한 상당히 위험스럽기도 하다.
(가끔씩 발을 헛디뎌 낭떠러지로 떨어져 죽는 사람들도 생긴다.)

이들 악동 셋은 절벽과 절벽 사이를 건너뛰기 시합을 했고 낭떠러지에 낡은 로프를 걸고 오르내리기도 했다 하는데 그때당시 그들이 어떻게 살아남았는지 본인들도 기적이라고 두 사람은 말한다. 내가 왜 세 사람이 아닌 두 사람이라고 했는지는 지금부터 말하려 한다.

영죤은 (죤의 아들을 Young John 이라 불렀다) 이곳 던모어의 청년들이 대부분 그렇듯 어부가 되었다. 그는 집안의 구조를 갖춘 작은 이동주택 카라반(Caravan)에서 살았고 아버지의 집 바로 뜰 앞에서 살았다고 한다.
(집이 없는 사람들은 곧잘 이런 카라반에서 살기도 한다.)
한 집에서 함께 살지 않고 굳이 카라반에서 따로 산 이유야 정확히 모르겠지만 작은 오두막집이어서 자기만의 공간을 갖기 위해 카라반 생활을 했던 것 같다.

그도 어부들 모두가 그렇듯 이른 새벽에 일어났고 부지런한 어부생활을 하였다. 자식들 중에서도 영죤은 가장 두드러지게 아버지를 기쁘게 하는 자식이었다고도 한다.

이른봄 영죤은 매일 그렇듯 밤늦게 일을 마치고 그의 작은 공간 카라반으로 돌아왔으며 고단한 몸은 쉽게 잠 속에 빠져들었다.
그의 작은 카라반의 유일한 난방시설은 석유난로였었고 곤히 잠든 영죤은 불이 지핀 석유난로를 그만 잠결에 발로 차내버린 것으로 사람들은 추측한다.
카라반은 이내 불길에 휩싸였고 집안에서 잠을 자고 있던 아버지 죤은 불타는 소리에 황급히 뛰쳐나왔지만 카라반은 이미 손을 쓸 수 없을 정도로 불길이 하늘을 향해 찌르듯 하였다고 한다.

망연자실한 죤은 불구덩이 속에서 갈고리로 새까맣게 타버린 아들의 시체를 꺼내야 했다고 하는데 그때 죤의 마음도 아들의 시체처럼 새까맣게 타 버리지 않았을까 싶다.
1983년 4월 영죤의 나이 23살이었다.
죤은 지금도 그 날밤 불타오르는 카라반과 새까맣게 타버린 아들의 시체를 찾아내는 꿈을 간간이 꾸곤 한다는데 꿈에서 깨어날 때마다 온몸이 땀에 젖은채 비명을 지르며 깨어난다고 한다.

죤은 허를 찌르는 장난궤변으로 나를 늘 놀렸고 그럴 때마다 나는 웃어대기에 바빴지만 그가 그런 뼈아픈 사연을 갖고 있는지 처음부터 알지는 못했다.

누추한 오두막집에 살고있는 죤은 TV 나 Video를 고치는 일이 그의 생계였지만 그는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돈을 한푼도 받지 않았다. 그렇다고 부자들에게 더 많이 받는 것은 물론 아니었지만.

그는 하루종일 헛간 같은 작업실에서 백열등 하나를 달고 사방이 TV와 Video가 쌓인 곳에서 그렇게 TV 뒤통수를 보며 일했다.

그의 낡은 그 작업실 문에는 이런 팻말이 걸려있다. "Gone fishing" (낚시하러 갔음)

정의롭고 박식하고 늘 재치 있는 궤변이 언제나 풍부한 할아버지 죤은 실은 나의 시어머니 아일린의 남자친구이다.
아일린의 남편 (그러니 나에게는 시아버지이지만 나는 한번도 그분을 만나보지 못했다)이 15 여년 전 세상을 뜨고 난 후, 먼저 홀로 된 죤은 자연스레 아일린과 친구가 되었다고 한다.

죤은 아일린의 집 헛간에 작업실을 차렸고 얼마 전 정년퇴직을 할 그때까지 그는 줄 곳 그곳에서 고장난 TV들 속에 둘려 쌓여 수많은 TV들을 고쳐내었다.

한번은 우리집 비디오가 고장이 나서 죤의 손을 빌린 적이 있었다.
체조비디오 테이프를 자주 보다 고장이 났었는데 죤은 다 고친 다음 그 체조 테이프를 시험삼아 틀어보고 나에게 대뜸 이런말을 한다.
"이렇게 사람들이 비디오 속에서 뛰고 발광을 하니 비디오가 고장이 나지! 얌전하게 앉아있는 사람들이 들어있는 비디오를 보면 고장도 안난다구"
나는 또 까르르 웃는다.

그 날은 칠흑같이 어두운 밤이었고 거세게 몰아치는 폭풍은 심장 약한 사람의 심장을 충분히 오그라들게 할만한 그런 사나운 밤이었다.
유리창을 깰 듯 성난 폭풍우 소리는 집안에서 들려오는 웃음소리 같은 건 용납하지 않을 것처럼 기세가 당당했으므로 성난 자연 앞에서는 묵묵히 밤을 보내야 할 것 만 같았다.

전화벨 소리가 폭풍우 소리를 이겨내려는 듯 안간힘을 쓰고 울렸다.
고기잡이배 제날리사(Zenalisa)가 실종되었다는 뉴스를 누군가 전해주고 전화는 끊겼다.

제날리사라면 피터의 배였고 피터라면 죤의 첫째 아들이었다. 설마 피터의 배는 아닐 거야 라는 생각이 문을 두드리는 노크소리에 확정되고 있었다.
피터의 배 이름은 제날리사가 맞았고 실종된 배는 제날리사였다. 피터의 제날리사는 그와 두명의 선원과 함께 하루 일과 고기잡이를 끝내고 항구로 돌아오는 길에서 사라져버렸다고 했다. 이토록 사나운 밤 육지를 코앞에 두고 배가 실종되었다면 정말 앞이 깜깜한 이야기였다.

비옷을 걸친 데이빗은 쏜살같이 던모어의 항구를 향했으나 그가 바다에서 실종된 사람을 돕기 위해 할 일은 사실 아무것도 없을 것이었다.
폭풍우소리 속에서 기를 쓰고 들려오는 헬리콥터소리도 내겐 점점 크게 들리기 시작했고 그렇게 낮게 뜬 헬리콥터는 한줄기 빛을 발하곤 사라져갔다.

그 날밤 거세게 폭풍우를 일으키던 던모어의 짙푸른 바다는 세 명의 산 재물을 삼킨 뒤 진정되었다.

세 명의 어부 중 21살 어부청년의 시체는 물위에 떠올랐으나 선장인 피터를 포함한 나머지 한 명은 결국 찾지 못했다. 1996년 2월 그의 나이 39세였다.

그 날, 죤은 아무말도 하지 않았으며 온몸을 부르르 떨기만 하였다.

다음날 나는 그를 볼 면목이 없었다.
그는 가슴을 절여 녹이는 불행을 맛보고 있는 사람이었고 그에 비한다면 나는 행복한 사람이었기 때문이었다.
나 행복한 사람은 그 불행한 사람에게 아무런 위로가 되어줄 수도 없었고 설령 그렇다 할 지라도 그에게는 아무 의미도 없는 것일 터였다.
나는 그 불행한 사람의 아픔을 감히 알지 못하므로 함부로 그의 아픈 얼굴을 본다는 건 무례한 것이라고 생각되었다.
나는 내 아이의 콧물감기를 염려하였지만 그 불행한 사람은 자식의 죽음에 시체조차 찾지 못하는 아픔을 지녔으므로 나는 그에게 아무런 할말이 없었다.

다음날 내가 본 죤의 얼굴은 그동안 내가 본적이 없었던 낯선 얼굴이었다.
그의 눈은 벌겋게 충혈 되었으며 하룻밤사이에 세월을 모두 안아버린 듯 그는 그렇게 더 늙어있었다.
전날부터 아무것도 먹지 못했을 그를 생각하여 나는 야채죽을 끓여 그 앞에 죄인처럼 살며시 내려놓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애써 태연하려 했으나 나는 오히려 그런 그를 보기가 민망했다.
그렇게 피터가 시체도 보이지 않고 바다속으로 영원히 사라지고 보름이 지났을까!
그 날 나는 그의 새까맣게 타다못해 이젠 하얗게 재가 되어버린 그의 모습을 잠깐 볼 수 있었다.
그는 낡아 녹슨 파란 차 속 운전석에 조그맣게 앉아있었고 그의 주름진 볼에 눈물가닥 하나가 희미하게 흘러내리고 있었다.

죽음이 가져다주는 고통은 살아남은 자의 차지인가!

수주가 지났지만 끝내 피터의 시체는 찾지 못하였다.
수장된 배를 끌어올릴 만한 특별한 장치의 선박은 아일랜드내에서는 없었으므로 프랑스로부터 요청하느라 그렇게 수주의 기간이 흘렀다고 한다.
해초들에 감겨 올려진 제날리사는 영락없는 유령선이었다.

그렇게 또 수주가 지났고 장사지낼 시체조차도 없는 비통한 아비는 아들을 기리는 기념비를 만들었고 교회 신부는 그 기념비를 대신하여 장례식을 치렀다. 늘 낡은 셔츠와 여름 샌들을 신고 살던 죤은 그 장례식날 검은 넥타이를 매고 양복자켓을 입고 장례식에 참가하였다.
나는 처음으로 그가 넥타이를 맨 차림을 보았다.
그는 다시는 넥타이를 맬 일이 없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제날리사와 함께 익사한 21살의 젊디젊은 청년의 아비도 그 장례식에 참가했으며 그는 아들의 죽음을 스스로에게 탓하고 있었다.
어부인 아버지는 아들을 못 가게 막고 자신이 대신 그 고기잡이배에 탔더라면 아들을 살리고 내가 죽었을텐데 하며 비통해했다.

피터는 부지런한 사람이었고 타고난 일꾼이었다. 그는 어려서부터 고기잡이배 그림 그리기를 좋아했고 어부가 천직인 그는 휴일이면 바위에 앉아 낚시를 즐겼다고 하니 그가 얼마나 바다를 좋아한 사람인지는 짐작하고도 남겠다.

죤의 오두막집에는 손목시계가 멈춘 채 걸려있는걸 볼 수 있다.
그는 아들의 실종소식을 듣고 맨 먼저 그의 손목시계를 풀어 시간을 정지시켰고 그 시계를 집안에 걸어두었다. 그리고 그 정지된 시계는 그렇게 정지된 채 그의 작은 오두막에 그 날 이후 6년째 지금도 침묵을 지키고 있다.

그가 사는 동네의 작은 시골마을의 화이트 펍에는 하루를 열심히 살고 온 어부들과 동네사람들이 술 한잔으로 하루를 마감하려 한둘씩 모여든다.
나는 죤과 아일린을 따라 곧잘 이 시골펍을 드나들던 어느 날이었었다.
죤의 궤담을 들으며 킬킬거리고 있던중 피터가 펍 문을 열고 들어서고 있었다.
나는 반갑게 죤에게 말했었다.
"죤. 피터예요. 피터가 저기 오고있잖아요"
죤은 심드렁하게 대답했었다.
"피터? 나도 알고있는 사람이야."
당신 아들이 오고있다고 알리는 나에게 자신도 저 사람 아는 사람이라고 대답하는 죤. 나는 또 키득거렸고 죤의 말대로 아버지와 아들은 마치 알고지내는 이웃처럼 가볍게 파인트(pint 500ml) 잔을 올려 건배하던 모습이 아직도 생생히 떠오른다.

이제 죤의 장난궤변은 더 이상 듣기 힘들어졌다. 그는 부쩍 말수가 줄었으며 웃음보다는 깊게 드리워진 그늘이 먼저 눈에 띄곤 한다.
그의 심장은 몹시 약해졌으며 힘을 잃은 그의 초췌한 모습을 보고있노라면 웬지 가슴이 아리는 듯 하다.

사랑한다는 것은 아린 고통이고 사랑이 깊은 만큼 고통도 깊어진다.
미워하는 마음 역시 매 마찬가지인 쓰디쓴 고통이라고 한다면 사랑하지도 말고 미워하지도 말며 그저 알고 지내는 관계와 사연에서 멈출 수는 없을까...

죤의 멈춰버린 손목시계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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